총회역사위, 사곶교회.진촌교회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지정감사예배」 드려
백령도에서 사곶교회(제44호). 진촌교회(제45호) 총회장 김종혁 목사, ‘믿음의 유산을 남기자’, 말씀전해 총회역사위원장 손원재 장로, "다음세대에 귀하고 값진 역사를 물려 주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총회장 김종혁 목사) 역사위원회(위원장 손원재 장로)가 10월15일(화) 오후 7시30분 백령도 사곶교회당(이봉우 목사 시무)에서 총회 임원들과 인천노회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곶교회와 진촌교회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지정감사예배」를 드렸다.
총회역사위원장 손원재 장로의 사회로 드려진 「1부예배」는 부총회장 김형곤 장로의 기도, 총회 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의 성경봉독, 사곶교회.진촌교회 장로 일동의 특송 후 총회장 김종혁 목사가 신 6: 4- 9을 본문으로 ‘믿음의 유산을 남기자’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후 총회역사위원회 총무 이진근 목사의 광고 후 총회 서기 임병재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2부 사적지 지정식」은 총회역사위 부위원장 석광희 목사의 사회 가운데 총회역사위원장 손원재 장로의 사적지 소개 후 총회장 김종혁 목사가 사곶교회 이봉우 목사와 진촌교회 이철 목사에게 지정 증서를 증정한 후, 사곶교회 이봉우 목사와 진촌교회 이철 목사의 인사, 인천노회 이용범 목사의 환영사, 총회 부서기 서만종 목사, 총회 회계 이민호 장로, 총회 총무 박용규 목사의 격려사, 기독신문사 사장 태준호 장로, 통일목회개발원 원장 김찬곤 목사, 총회 농어촌부 부장 김상기 목사의 축사로 마쳤다.
「3부 현판 제막식」은 총회역사위 서기 한민수 목사의 사회로 총회역사위 회계 김기현 장로의 기도 후 총회장 김종혁 목사와 총회역사위원회 위원장 손원재 장로, 인천노회, 사곶교회.진촌교회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사곶교회■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4호)
백령도는 1816년 맥스웰 대령 일행, 1832년 귀출리프 선교사 일행, 1865년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두 번이나 체류하며 복음이 전래된 곳이다. 사곶교회는 자생교회인 중화동교회(1896)로부터 분립하여 첫 번째로 세워진 교회다. 1901년 봄부터 사곶에 사는 김잔돌, 김영희, 김장립, 김찬돌, 김홍준, 안기중, 김윤광 씨 등 7인이 자발적으로 예수를 믿을 맘이 생겨서 중화동교회를 방문해서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5년 동안 주일마다 점심을 싸가지고 30-40리(16km)가 넘는 먼 거리를 이른 새벽에 출발해서 성경공부회, 그리고 낮 예배, 저녁에배까지 모두 참석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올 정도로 열심을 냈다. 1905년 사곶동 서쪽에 초가 3칸 예배당을 건축했는데, 초가지붕에다가 흙벽, 그리고 바닥에는 가마니클 깔고 1905년 9월 15일 모교회인 중화동교회로부터 분립하여 창립예배를 드렸다. 일제강정시대에 백령도에서도 예배를 방해하기 위하여 예배당에 가마니 짜는 기계를 들여놓게 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방해 한 일이 있다. 물론 사곶교회도 예외는 아니였다. 사곳교회도 일제가 가마니 짜는 기계를 예배당에 들여놓으려고 했지만 강력하 게 항의해서 결국 가마니 짜는 기계를 들여 놓지 못했고, 계속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때 한 동안이지만 진촌교회 성도들이 사곶교회에 와서 예배를 함께 드렸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전쟁의 군수물자가 부족해서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예배당의 종까지 떼어 갔다. 이 사실을 알고 김병준 장로와 김층준 성도가 그 종을 다시 찾아왔다. 이처럼 사곶교회는 일제의 잔학한 탄압 속에서도 꿋꿋히 신앙을 지켜냈다. 사곶교회는 신사참배 말기인 1940년에 당회가 조직되었다. 교회를 설립한지 35년만의 일이었다 2001년 3월 8일 현 예배당을 창립100주년 기념교회로 건축하여 입당예배를 드렸으며, 2005년 11월 29일 창립100주년 감사예배와 성전 봉헌식을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역사적 의미, 민족운동 사적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여 2025년이 창립120주년을 맞이하여 역사사적지 지정을 청원 하게 되어 제109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하였다.
■진촌교회■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5호)
백령도는 1816년 맥스웰대령 일행과 1832년 귀출라프 선교사 일행 1865년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두 번이나 체류하면서 복음이 전래된 곳으로서 진촌교회는 자생교회인 증화동교회를 모체로 해서 설립되었는데 당시 증화동교회의 허윤. 허간 그리고 청년 몇 사람이 1904년 진촌 잿등에서 대중 집회를 열고 개인 전도를 통해 이윤범, 장성록 두 사람이 결신하게 되었다. 이들이 진촌에서 매주일 중화동교회로 예배들 드리러 다니다가 1905년 중화동교회에서 분립된 사곶교회로 예배클 드리러 다니던 증 성도수가 점차 증가하게 되자 1906년 4월 15일 이윤범씨가 자신의 집을 헌당함으로 중화동교회를 이어 자생적으로 세워진 교회가 되었다. 그후 진촌교회가 은혜 중에 날로 부흥 성장함으로 인하여 1923년에 대지 30평을 구입하여 예배당을 신축하여 헌당하였으나 1943년 일제강점기 중에 교회를 폐지당하고 사곶교회와 연합해서 예배를 드렸고 1945년 일제가 연합군에게 패망하고 해방된 후 교인들이 힘을 모아 옛 교회를 보수하여 감사예배를 드렸다. 진촌교회는 1949년에 당회가 조직되었고 1952년에 진촌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53년 11월 12일 한국전쟁 이후 해병대의 도움으로 지금은 북한 땅이 된 석도교회의 건축자재와 교인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두 번째 성전을 건축하고 1953년 11월 12일 군과 민이 연합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첫 사례가 되었다. 1991년 12월 17일 현 예배당을 창립하고 입당예배를 드렸으며 1995년 4월 26일 헌당하며 감사예배를 드렸다. 2006년 4월 25일 창립 100주년 감사예배를 드렸으며 정부로부터 백령도 노인요양원 인가를 받고 2009년 7월 9일 개원 감사예배를 드렸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촌교회는 역사적 의미를 담아 군선교, 지역부대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백령관내의 다음세대 자녀들과 노년세대, 어르신들의 구원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하여 역사사적지 지정물 청원하게 되었으며 제109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