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최초의 전도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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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최초의 전도지에 대하여
  • 개혁타임즈(Reformed Times)
  • 승인 2023.03.0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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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전도지는 ‘이샹한 말삼’
언더우드 선교사도 제중원애서 전도지 배포
언더우드 선교사가 배포한 전도지
언더우드 선교사가 배포한 전도지(연세대 의료원 제공)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를 대표하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545일 부활주일에 나란히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에 첫발을 내딛었다. 인천시 항동에 있는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탑'에는 당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부수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간구하오니 어둠속에서 억압을 받고 있는 이 한국 백성에게 밝은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188545일 부활주일에)

선교의 관문 인천을 통해 전해진 복음은 한국교회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 설립으로 이어지고, 이후 도성 밖까지 교회들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연동교회(김주용 목사 시무), 승동교회(최영태 목사 시무), 상동교회(이성조 목사 시무)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 이전에 이미 1832년 최초로 한국선교를 시도한 귀츨라프 선교사를 비롯해서 1866년 토마스 목사 등이 쇄국정책으로 굳게 닫힌 조선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조선과 청나라 국경지대에서 1872년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 선교사가 의주 상인들을 만났고 이들 중에 최초의 개신교 수세자가 나오게 되었다. 의주 출신 조선인들은 선교사들을 도와 성경번역에 참여해 188110월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이 간행됐고 1882년에 예수셩교누가복음젼서, 예수셩교요안ᄂᆞ복음젼서가 간행됐다.이러한 토양 위에서 조선인에 의한 자생적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마침내 1884년 소래교회가 설립됐다. 특히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간 이수정은 1883년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고 현토한한신약전서라고 한문성경에 한글로 토를 다는 작업, 한글 마가복음 번역 작업을 했다. 이수정은 미국 선교잡지에 조선선교를 호소하는 글을 기고함으로서 미국장로교선교부가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국교회가 성장해 가는데 이렇게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면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권서들이다. 권서란 조선시대의 보부상들처럼 개나리 봇짐을 꾸려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성경 쪽복음을 팔며 보급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스코틀랜드 선교사였던 로스 목사가 1885년에 한국을 밟은 최초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보다 3년이나 빠른 1882년 만주에서 성경을 번역하여 그중에 500권을 한국 최초의 권서였던 서상륜에게 주어 평안도 의주에서 팔게 했고, 1883년에는 권서 류순천을 평양으로 보내 성경을 보급하게 함으로써 선교사들보다 먼저 성경이 배포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권서들이 수고한 결과 1908년부터 1940년까지 한국의 전체 성경 보급의 85%가 권서들의 부르튼 발복음 짐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교회에서 문서선교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렇다면 한국교회 최초의 전도지는 어떠했을까?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2015년 소천한 예장합동 증경총회장 신세원 목사(창신교회 원로) 가 헌 책방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 냈다는 석판 인쇄로 되어 있는 전도지인 이샹한 말삼이다. 내용은 하나님이 셰샹을 이처럼사랑하샤 독생자를 주셨스니 누구던지 뎌를 밋으면 멸망하지 안코 영생을 엇으리라. 요한 . 十六. “으로 되어 있다. 학자들은 이 전도지를 지질, 색깔, 문체, 어법 등으로 미루어 1886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전도지는 해를 거듭하여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다양하게 발전하였는데, 예를 들면 불신 동포에게 고함’ ‘복된 소식등이었다. 이 때의 전도지의 내용은 성경말씀이 아니고 철학적이며 문학적이었다.

한국교회 역사 가운데 특별히 선교에 있어 '문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다. ‘문서선교는 크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한국교회 선교역사에서 보이지 않는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문서선교가 가장 활발히 진행된 시대는 개화기 때였다. 이 시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은 성경번역과 개정작업, 신문 잡지 등의 정기간행물 발행, 단행본 번역 및 출판 작업에 열심을 냈다. 문서를 통한 간접전도가 가장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반() 서학 분위기 속에 직접전도가 어려울 뿐더러 한국인들이 부를 찬송가와 읽을 성경, 교리서의 필요성이 요구됐다.

구한말 연희전문학교 설립자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박사도 세브란스 설립자인 에비슨(O.R. Avison) 박사의 의료선교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백성들에게 전도지를 배포했다.

이 전도지는 언더우드 박사가 1894년부터 1904년 무렵 구리개(銅峴·현재 을지로 입구)에 있던 제중원을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아 활동하던 시절 일반인들에게 나눠줬던 전단지다. A4 용지보다 작은 크기의 갱지 한 장에 앞·뒷면으로 '하나님께 감사'라는 제목으로 추수감사절과 예수의 부활 등을 설명하고 있다. 전도지 뒷장 맨 마지막에는 '서울 제중원에 고명한 영국의원이 병인 치료하오니 병잇는 사람들은 그리로 가시오'라고 세브란스 병원을 소개하는 문구가 적혀 있다.

언더우드 박사는 에비슨 박사가 무료 왕진을 나갈 때마다 따라다니며 전도지를 나눠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박형우 관장은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초기 의료선교 활동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매우 희귀한 자료"라며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구한말 서양문명의 유입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 전도지는 지난 20073일 연세대 의료원이 출간한 '사진으로 보는 근대의학 120' 화보집 5051쪽에 사진으로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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