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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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는 누구인가?
  • 개혁타임즈(Reformed Times)
  • 승인 2019.09.2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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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때, 수련회에서 목사 소명받아
광신 때 화순 백암리에 헛간을 빌려 교회 개척
1988년에 서울 가락동에 23평짜리 지하점포에서 개척
2005년 분당넘어 죽전시대를 열어
2019년 부총회장 단독 후보로 당선

소강석 목사는 누구인가?

 

취임 감사예배에서 인사하는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

소강석 목사의 고향은 전북 남원군 이백면 초촌리이다. 엄격한 유교적 가풍에서 자란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군산제일고에 입학하고 나서다. 고교 2학년 때 예쁜 여학생을 소개해 주겠다는 후배의 말을 듣고 군산의 한 교회에 나가게 된 후 3학년 때 수련회 차 용화산 기도원으로 가서 기도굴에서 밤샘기도하다가 목사가 되겠다는 소명을 품게 되었다.

그 일로 한학에 조예가 깊은 무신론자 아버지와 어머니, 큰 형님 등의 지속된 큰 핍박에 가출을 하게 된다. 집에서 나온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감동을 따라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광주로 가 당시에는 무인가 신학교였던 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에 진학해 고학(苦學)으로 신학교를 다녔다. 양복이 없어 설교할 기회를 놓치자 “양복 한 번 입게 해 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주말에 혼자 기숙사에 남아 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그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꿈, 꿈틀거리는 광야의 야성을 품고 21세 청년 때에 모두가 다 반대하던 화순 백암리에 들어가서 헛간을 빌려 교회를 개척했다. 초기에는 미신을 신봉하는 마을 유지들이 교회 가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물리고 교회에 분뇨를 뿌리는 등 엄청난 방해를 했지만 “꿈 없이 잠든 적 없고, 꿈꾸지 않고 눈뜬 적 없다”는 그는 3년6개월을 고생한 끝에 마을에 교회를 건축하였다. 그 과정 가운데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믿음의 배경이 없는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고, 그 때에 후일 장모가 된 정금성 권사를 만났고, 결코 목사의 아내가 되지 않겠다는 정 권사의 딸을 끝까지 따라다녀 결혼에 골인했다.

 

소강석 목사 모습
소강석 목사 모습
소강석 목사 모습
소강석 목사 모습

광주신학교 졸업 후 대학원 공부를 위해 백암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온 그는 인맥이 없어 애초부터 큰 교회 전도사는 꿈도 못 꾸고 스스로 개척할 각오를 다졌다. 26세였던 1988년에 서울 가락동의 23평짜리 지하점포를 1,000만원 보증금에 48만원 월세로 얻은 뒤 첫 예배를 건물주인과 간판집 주인 등 달랑 4명이 인사차 참석한 가운데 드렸다. 그나마 밤에는 아내와 장모밖에 없는 가운데 쥐들만 찍찍 소리를 내며 오갔다. 그럼에도 그는 나의 후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믿으며 더 많은 신자를 보내달라고 호소하며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고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밤을 지새고 또 낮에는 전도하는 반복된 생활하기를 수 백회, 소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부흥의 비전을 확신하는 가운데 사생결단하듯 목회에 매달리며 고달픈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버텨나갔고, 그러는 가운데 4년째가 되었을 때 25평의 지하 예배당에서 120평 상가 예배당으로 옮겨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94년에는 분당에 400평의 교회 부지를 마련하고 우선 130평 지하점포에서 예배를 시작했으나, 교회 부지 위로 국내 최고의 고압선이 지나가고 있어서 건축을 할 수 없게 되어 토지공사, 한전과 합의를 하여 다른 장소를 분양받았으나 인근 주민들의 반대와 시공회사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새에덴교회 설립 3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새에덴교회 설립 3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이런 어려움 가운데 소강석 목사에게 협심증으로 인한 심장마비 증세가 찾아왔고,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했지만 그는 병원이 아닌 교회 건축현장에서 버텼다. 그 결과 까다로운 준공검사를 끝내고 드디어 1996년 11월 16일에 45억원을 들여 1030평의 예배당을 완공해 감격적인 입당예배를 하게 되었지만 순식간에 1,000명을 넘어섬으로 분당 예배당의 한계를 체감하고 다시 분당을 떠나 죽전시대를 준비하게 된다.

 

새에덴교회 설립 30주년 기념음악회
새에덴교회 설립 30주년 기념음악회

특히 소강석 목사가 죽전 시대를 계획하게 된 것은 분당 예배당의 협소함과 함께 2001년 평양 창광유치원 방문을 통해 주체사상 교육에 충격받아 통일 한국을 위해서는 인성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소 목사는 2002년에 죽전동 산 50번지에 대지 2000평의 새성전 부지를 구입하고 2003년 기공예배를 드리고 연면적 1만 평으로 지하 3층 지상 10층 규모, 교회 본당이 4500석으로 그리 크지 않은 대신 다목적홀, 독서실, 인터넷룸, 식당, 피트니스클럽 등을 개설해 평일에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배치한 교회당을 약속의 복합건물이라는 뜻으로 ‘프라미스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이고 건축을 시작해 2005년 10월 22일에 성전 완공과 입당을 거쳐 죽전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총회장 소강석 목사의 처절한 외침
소강석 목사 모습

이러한 소강석 목사에게 새에덴교회는 3M(맨손, 맨몸, 맨땅)의 목회자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3M으로 시작된 새에덴교회의 역사는 이제 장엄한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역사로 다시 타오르고 있다. 새에덴교회는 프라미스 콤플렉스 시대 개막과 함께 한국교회의 영적 장자 교회를 꿈꾸며, 통일한국시대를 준비하는 민족 성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대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야생마처럼 불타는 소명감 하나로 달려온 소강석 목사의 끊임없는 로드 쉼의 열정과 헌신은 새에덴교회 모든 성도들의 가슴, 가슴 위에 불씨로 옮겨져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새에덴교회는 이제 갈매기의 꿈처럼 더 높은 꿈의 고도를 향하여 죽전을 넘어 한반도과 세계로 비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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