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때 가출해 제104회 부총회장이 되기까지(부총회장 소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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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때 가출해 제104회 부총회장이 되기까지(부총회장 소강석 목사)
  • 개혁타임즈(Reformed Times)
  • 승인 2019.10.05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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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때, 목사 소명받고 가출해 광주로
광신 때 화순 백암리에 헛간을 빌려 교회 개척
1988년에 서울 가락동에 23평짜리 지하점포에서 개척
2005년 분당넘어 죽전시대를 열어
2019년 부총회장 단독 후보로 당선
제104회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사회를 보는 소강석 목사
제104회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사회를 보는 소강석 목사
제104회 총회 총대들 단체사진(충현교회)
제104회 총회 총대들 단체사진(충현교회)
제104회 총회 임원들 모습
제104회 총회 임원들 모습
소강석 목사의 부총회장 당선을 축하하는 새에덴교회 교인들 모습
소강석 목사의 부총회장 당선을 축하하는 새에덴교회 교인들 모습

전북 남원이 고향인 소강석 목사는 엄격한 유교적 가풍에서 자라다가 고교 2학년 때 예쁜 여학생을 소개해 주겠다는 후배의 말을 듣고 군산의 한 교회에 나갔다가 3학년 때 용화산 기도원으로 가서 기도굴에서 밤샘 기도하다가 목사가 되겠다는 소명을 품게 된다.

그 일로 가족들의 지속된 큰 핍박을 받게 돼 결국 가출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광주로 가 당시에는 무인가 신학교였던 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에 진학해 고학(苦學)으로 신학교를 다녔다. 양복이 없어 설교할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 주말에 혼자 기숙사에 남아 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다가 기도 중에 모두가 다 반대하던 화순 백암리에 들어가서 헛간을 빌려 교회를 개척했다. 초기에는 엄청난 방해가 있었지만 3년6개월을 고생한 끝에 마을에 교회를 건축하였다. 그 과정 가운데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믿음의 배경이 없는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고, 그 때에 후일 장모가 된 정금성 권사를 만났고, 결코 목사의 아내가 되지 않겠다고 버티던 정 권사의 딸을 끝까지 따라다녀 결혼에 골인했다.

광주신학교 졸업 후 대학원 공부를 위해 백암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온 그는 인맥이 없어 애초부터 큰 교회 전도사는 꿈도 못 꾸고 1988년에 서울 가락동에 있는 23평짜리 지하점포를 1,000만원 보증금에 48만원 월세로 얻은 뒤 첫 예배를 건물주인과 간판집 주인 등 달랑 4명이 인사차 참석한 가운데 드렸다. 그럼에도 그는 나의 후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믿으며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밤을 지새고 또 낮에는 전도하는 반복된 생활하기를 수 백회, 소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부흥의 비전을 확신하는 가운데 사생결단하듯 목회에 매달리며 고달픈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버텨나갔고, 그러는 가운데 4년째가 되었을 때 25평의 지하 예배당에서 120평 상가 예배당으로 옮겨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전국호남협의회에서 소강석 목사 모습
전국호남협의회에서 소강석 목사 모습
서울지역노회협의회 체육대회에서 소강석 목사
서울지역노회협의회 체육대회에서 소강석 목사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체육대회에서 소강석 목사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체육대회에서 소강석 목사

1994년에는 분당에 400평의 교회 부지를 마련하고 우선 130평 지하점포에서 예배를 시작했으나, 교회 부지 위로 국내 최고의 고압선이 지나가고 있어서 건축을 할 수 없게 되어 토지공사, 한전과 합의를 하여 다른 장소를 분양받았으나 인근 주민들의 반대와 시공회사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 소강석 목사에게 협심증으로 인한 심장마비 증세가 찾아왔고,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했지만 그는 병원이 아닌 교회 건축현장에서 버텼다. 그 결과 까다로운 준공검사를 끝내고 드디어 1996년 11월 16일에 45억원을 들여 1030평의 예배당을 완공해 감격적인 입당예배를 하게 되었지만 순식간에 1,000명을 넘어섬으로 분당 예배당의 한계를 체감하고 다시 분당을 떠나 죽전시대를 준비하게 된다.

특히 소강석 목사가 죽전 시대를 계획하게 된 것은 분당 예배당의 협소함과 함께 2001년 평양 창광유치원 방문을 통해 주체사상 교육에 충격받아 통일 한국을 위해서는 인성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소 목사는 2002년에 죽전동 산 50번지에 대지 2000평의 새성전 부지를 구입하고 2003년 기공예배를 드리고 연면적 1만 평으로 지하 3층 지상 10층 규모, 교회 본당이 4500석으로 그리 크지 않은 대신 다목적홀, 독서실, 인터넷룸, 식당, 피트니스클럽 등을 개설해 평일에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배치한 교회당을 약속의 복합건물이라는 뜻으로 ‘프라미스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이고 건축을 시작해 2005년 10월 22일에 성전 완공과 입당을 거쳐 죽전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제104회 총회에서 선거전 소강석 목사 모습
제104회 총회에서 선거전 소강석 목사 모습
새에덴교회 창립30주년 기념음악회 모습
새에덴교회 창립30주년 기념음악회 모습

이러한 소강석 목사에게 새에덴교회는 3M(맨손, 맨몸, 맨땅)의 목회자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3M으로 시작된 새에덴교회의 역사는 이제 장엄한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역사로 다시 타오르고 있다. 새에덴교회는 프라미스 콤플렉스 시대 개막과 함께 한국교회의 영적 장자 교회를 꿈꾸며, 통일한국시대를 준비하는 민족 성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대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야생마처럼 불타는 소명감 하나로 달려온 소강석 목사의 끊임없는 로드 쉼의 열정과 헌신은 새에덴교회 모든 성도들의 가슴, 가슴 위에 불씨로 옮겨져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새에덴교회는 이제 갈매기의 꿈처럼 더 높은 꿈의 고도를 향하여 죽전을 넘어 한반도과 세계로 비상하고 있다.

2005년 9월 27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90회 총회에서 합동과 개혁이 통합한 후 지속적으로 겸손과 헌신의 자세로 교단을 섬겨온 소강석 목사는 제104회 총회를 앞두고 부총회장 출사표를 던졌고, 그는 단일 후보로 충현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앞서 교갱 이사장인 이건영 목사(인천제2교회 담임)는 “총회가 개혁측을 복음의 동역자로 받아 드린 지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그 형제들 중에 총회장이 선출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한다.”며 불출마를 밝혔다.

부총회장 당선 후 기뻐하는 소강석 목사
부총회장 당선 후 기뻐하는 소강석 목사
제104회 총회에서 발언하는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
제104회 총회에서 발언하는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
제104회 총회 총회장 김종준 목사, 총준위원장 박병호 목사,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
제104회 총회 총회장 김종준 목사, 총준위원장 박병호 목사,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

부총회장에 당선된 소강석 목사는 “총회장 김종준 목사님을 보좌하면서 겸손하게 배우고 훈련 받겠다”면서, “총회의 신학 정체성과 정통성을 지키면서 밖으로 나가서 연합활동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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