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후 북한교회 재건, 능히 감당해야
총회 내 영향력 확대 위해
친목넘어 단결돼고 하나돼야
《특별 논단》
「서북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윤영민 목사
(서북협 실무회장, 대한교회, 총신대원 교수)
I. 들어가는 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각각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5개의 지역노회협의회가 있다. 서울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서울지역노회협의회, 충청남북도와 강원도를 배경으로 하는 중부노회협의회, 전라남북도를 배경으로 하는 호남협의회, 경상남북도를 배경으로 하는 영남협의회, 그리고 현재는 잃어버린 땅인 북한 서북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서북지역노회협의회가 있다. 사실 서북지역노회협의회(이하 서북협)에 속한 교회와 회원들은 실재하는 지역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앞으로 미래에 통일될 북한 땅을 배경으로 한 지역노회협의회이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무지역노회이기 때문에, 그 소속감과 정체성이 모호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 속한 서북협의 역사적 정체성을 살펴, 왜 서북협이 필요하고,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의 그 역할들을 생각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서북협에 속한 회원들이 서북인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서북협의 사명을 다하는 일에 마음을 모으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II. 펴는 글
1. 서북지역노회협의회의 북한 역사성
서북협은 총회 내의 서울지역노회협의회, 중부지역노회협의회, 호남지역노회협의회, 그리고 영남지역노회협의회가 대한민국 남한의 지역을 각각 배경으로 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 역사적 뿌리가 북한에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북한 서북지역에서 시작한 총회
서북협의 “서북”은 지역적 의미로 6·25 한국 전쟁 이후 3·8선으로 분단된 북한지역 중 서북 방면인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가 활발했던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뜻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서북지역인 평안남북도, 황해도뿐 아니라, 동북 지역인 함경남북도, 자강도, 그리고 강원 이북, 그리고 경기 이북 지역을 포함한다. 넓게는 과거 노회가 존재했던 중국의 만주 연해주 일대까지 확장된다. 1942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기 직전에 북한지역에는 14개의 노회, 만주의 3개 노회, 그리고 연해주의 1개 노회가 존재했다.
한국 기독교와 장로교회의 뿌리는 북한 서북지역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독일 출신의 중국 선교사 귀츨라프는 1832년 서해안 황해도 장산곶 근방에 정박했고, 지금의 백령도에도 방문하여 복음을 전파했다. 그 후 33년이 지난 1866년 영국 출신의 중국 선교사 토마스는 북한 대동강변에 진출하여 공개 참수형으로 순교를 당하였다. 이렇게 북한 서북지역에서 최초 순교의 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최초의 세례자도 서북 출신이다. 평북 의주 출신의 이응찬, 서상륜, 서경조, 백홍준 등이 중국 만주에서 로스 선교사를 만나 1879년에 세례를 받았다. 성경도 1882년 중국 심양에서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서북 출신의 이응찬과 서상륜 일행이 존 로스와 존 메킨타이어 선교사를 도와 누가복음을 번역했고, 1883년에 한글로 된 최초 성경이 북한 의주 지역을 중심으로 들어온 것도 서북지역이다. 최초의 교회이자, 그것도 장로교회가 서북지역에 세워졌다. 1884년 서상륜에 의해 세워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마을의 소래(송천)교회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자생 교회라고 할 수 있다. 1885년에는 백홍준을 중심으로 의주에 장로교회인 의주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선교사 입국 이후에 세워진 공식적인 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새문안교회이었지만, “새문안교회의 최초 예배 시에 참석하여 세례받은 교인들이 거의 소래교회 출신이었다.” 장로교회의 신학적 모체가 되는 신학교도 서북지역에서 세워졌다. 총신대학교의 모체가 되는 소위 ‘평양신학교’라고 불리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가 1901년 서북지역인 평양에서 개교했다.
노회가 태동이 된 것도 서북지역 중심이었다. 최초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립)노회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36개의 조직교회의 장로들로 조직되었는데, 그중에 23개 당회가 서북지역 소속이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가 평양신학교에서 조직되었다. 이는 우리 총회도 서북지역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직된 노회들을 조직된 시기의 순서로 살펴보면, 1911년 조직된 황해노회는 황해노회와 황동노회로, 1912년 1월 28일 평양신학교에서 조직된 평북노회는 북평안노회와 산서노회로, 같은 해 같은 날 평양신학교에서 조직된 평남노회는 평양노회와 평서노회, 그리고 안주노회로, 마지막으로 그보다 하루 늦게 1912년 1월 29일에 조직된 함경노회는 함북노회와 함남노회로 분립하여 성장했다. 이후 일제의 잔혹한 교회 탄압과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 그리고 1942년 제31회 총회에서 일제가 총회를 해산하여 장로교의 역사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해방 당시 서북지역 노회는 모두 14개였다.
2) 서북 월남 목회자를 중심한 서북지역 노회
해방 이후 1945년 12월 1일 서북지역 교회들은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이북5도연합노회를 조직하고 김일성의 북한 정권을 비난하며 저항했다. 김일성 정권은 “공산정부 수립을 위해 가장 큰 방해 세력으로 기독교를 지목하고 평양노회를 해산시키고 기독교 지도자들을 탄압했다.” 이에 서북지역의 목사와 장로와 성도들이 월남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전후로 월남민들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해방 이후 남한으로 월남한 자들의 숫자는 50만에서 최대 200만명까지 추산하는데, 대략 월남자의 35-40% 정도가 개신교인들이었다고 추정한다. 월남 목회자는 월남한 교우를 위하여 교회를 개척하였고, 월남민 교회는 기존 남한 노회에 편입했다. 1947년에 열린 제2회 남부총회는 “1942년 31회 총회를 계승한 33회 총회로 개회할 것을 결정하고 월남한 수백 명의 교역자가 해당 노회 목사 3인의 추천으로 남한 내의 기존 노회에 가입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 그러던 중 흥남철수작전 시에 대거 월남한 함경도의 목회자들은 곧 통일되면 북한에 올라가 교회와 노회를 세울 것을 기대하며 남한 노회에 편입하기보다 피난 노회를 조직하고 동향인과 노회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총회에서 무지역 노회로 불리는 서북지역 노회들이 자연스럽게 탄생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분단의 상황이 오래갈 것을 예감한 총회는 1952년 4월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7회 총회에서 [월남한] 이북 노회 총대는 31회[1942년 총회 해산] 총회 총대에 준하여 받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이북 10개 노회인 평양노회, 평북노회, 안주노회, 평동노회, 용천노회, 황해노회, 황동노회, 평서노회, 함남노회, 함북노회가 조직노회로써 총회로 소속되었고, 1953년 4월 대구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8회 총회에서부터는 황남노회가 추가되어 11개의 서북지역 노회들이 정식으로 총회 총대로써 참석하기 시작했다.
3) 서북 무지역 노회를 중심한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이렇게 월남한 서북 배경의 목회자들이 총회에서 활발하게 목회하던 중에, 1968년 제53회 총회에서는 대회제를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전국을 5개 대회(중부, 충청, 호남, 영남, 서부)로 나누었다. 서부대회는 월남하여 조직된 무지역의 9개 노회(평양, 황해, 황남, 황동, 성진, 함남, 안주, 평북, 평서노회)로 구성된 대회이다. 서부대회는 1970년 제2회 대회에서 북한 서북 배경의 노회들이 모여 그들의 정체성을 바로 드러내고자 “서북대회”로 명칭을 변경해 사용하게 되었으나, 1972년 제57회 총회는 대회제를 실시한 지 4년 만에 폐지하였다. 그러나 서북지역 노회들은 이미 대회제를 통해 총회적으로 지역 기반을 마련하게 된 터라, 대회제 폐지에 대한 대안으로 이미 지역을 배경으로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던 총회 내 호남협의회, 충청협의회, 영남협의회처럼 서북지역 노회들의 협의회를 조직할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에 과거 서북대회에서 활동했던 서북지역 노회들이 1988년 9월 5일 총회 여전도회관 회의실에서 당시 서평양노회 김국일 목사를 중심으로 “서북지역노회협의회”를 발족하였다. 제1회 서북협의 창립총회에서 김국일 목사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참석 노회는 12개 노회로 동평양, 서평양, 안주, 용천, 함남, 함동, 함북, 황동, 황해, 평동, 평북, 평서노회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회원 노회가 더해져, 제3회 총회에서는 황해노회 최성구 목사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참석 노회는 15개의 노회로 기존에 중부, 평남, 평안노회가 더해졌다. 현재는 서북지역 노회들의 발전과 분립으로 인하여 2024년 제36회 서북협은 대표회장 장순직 목사를 필두로 42개 노회의 4,000여 교회로 성장해 총회 내 노회와 교회뿐 아니라 가장 총대가 많은 협의회로 발전하였다. 물론 현재 42개 노회 중에 북한지역과 관계없는 노회들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2005년 제90회 총회에서는 1979년 이탈한 개혁총회와 합동을 진행하여, 합동 이후 서북협에 가입한 개혁총회 노회는 개성, 경성, 경향, 관서, 동서, 함경 노회 등으로 노회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무지역 노회로 가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관서노회는 개혁총회 당시 남서울노회였지만, 합동 이후 관서노회로, 그리고 함경노회는 개혁총회 당시 경원노회였지만 함경노회로 명칭을 변경하여 서북지역 노회의 역사적 정통성 위치를 갖고자 했음을 본다.
북한에 뿌리를 둔 서북협은 총회 내에서도 많은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협의회 조직 이전에는 5명의 총회장이 선출되었다(47회 이환수, 49회 김윤찬, 57회 박성겸, 64회 한석지, 69회 최훈 목사). 협의회 조직 이후에도 8명의 총회장을 배출하였다(74회 동평양노회 이성택, 83회 동평양노회 길자연, 92회 황동노회 김용실, 95회 한서노회(현 서강노회) 김삼봉, 98회 황해노회(현 소래노회) 안명환, 101회 평양제일노회 김선규, 104회 동한서노회(현 새한서노회) 김종준, 107회 평서노회 권순웅 목사). 총회는 3 지역 순번 선출제를 시행하기 때문에, 협의회는 무려 15년 동안 연속적으로 총회장을 비롯하여 많은 총회 임원들을 배출한 것이다. 이는 협의회가 소속 인사를 총회의 총회장뿐 아니라 임원 및 상비부장과 각 위원회의 출마자를 추천하여 총회를 섬기게 한 결과이다. 이처럼 서북지역 배경의 무지역 노회들을 중심으로 한 서북협은 합동 교단을 세우는 일에 유력하게 이바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서북협의 역사적 정체성은 북한 서북지역 교회에 뿌리로 두고 있다. 앞서 살폈듯이, 이 땅에 최초로 복음이 전파된 것도 서북이고, 최초로 순교의 피를 흘린 것도 서북이고, 최초의 세례자도, 최초의 성경 번역과 배포도, 최초의 교회도, 최초의 노회도, 총회도, 신학교도 모두 서북에서 출발하였다. 서북을 제외하고 이 땅의 복음화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분단 이후에도 월남한 목회자와 월남민 교회들이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직접적인 동력이 되었음이 확실하다. 특별히 총회 내 5개 지역노회협의회 중에서 가장 많은 노회와 교회, 그리고 총회 총대를 가진 서북협은 세월이 지나 월남한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한국교회 초기에 보여준 서북지역 올곧은 신앙 전통을 이어가야 할 것이며, 그동안처럼 총회의 발전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땅의 복음화를 위해서 주력해야 할 것이다.
2. 서북지역노회협의회의 실천적 역할
그렇다면 북한 서북지역에 역사적 뿌리 둔 서북협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는 역할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총회 내에서의 역할, 둘째는 서북협 내에서의 역할, 그리고 셋째는 서북협의 근본적인 역사적 정체성인 북한선교에 대한 역할이다.
1) 서북지역노회협의회의 총회 내에서의 역할
서북협의 소속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총회 규칙에 명시된 지역노회협의회이다. 비록 서북협이 총회 내에서 공식적인 법적 권한이 없는 노회 협의체일지라도, 서북협은 총회 내에서 “본회의 권익 보호와 육성”을 위하여 총회의 의사 결정에 대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협의회는 각 노회를 대표하는 실무회장과 노회장을 통해 총회 내 주요 의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입장을 조율하여 총회의 의사 결정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학적 쟁점이나 교단의 정책적 방향을 논의할 때, 본회의 공통된 의견이나 제안이 총회에 전달되면 총회 내 논의에서 상당한 무게 있는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의견은 교단 총회 내에서 공식적 결의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이며, 협의회가 교단 내 의사 결정에 일정 부분 정치적 역할을 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협의회가 총회에 협의회의 유력한 인물을 총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총회 임원, 상비부장과 총회 기관장 출마자 등을 추천하여 총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쳐야 한다. 「서북지역노회협의회 회칙」의 “제8장 총회 임원과 조정”은 다음과 같이 하기로 규정하고 있다. “총회 임원 입추보자를 본 협의회에서 협의하여 조정한다.” 그리고 “본회는. . . 은혜로운 총회를 창출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며 상호간의 경선을 금하고 총회 임원과 총회 산하 각 부서 임원으로 출마시는 본 협의회에 협력한 자를 실행위원회에서 우선 추천한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협의회는 본 협의회 내에 적절한 인사를 추천하여 총회에서 활동케 하는 일을 힘써야 한다. 나아가 본회에 속한 노회와 총회 총대는 적극적으로 본회에서 추천한 인사가 당선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당선된 인사는 자신을 추천하고 당선에 협력한 협의회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 힘써야 한다. 총회 총대로 출석하며 갖는 아쉬운 점은 협의회에 속한 총대가 본회가 추천한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모습, 또한 당선된 후보가 추천하고 지지한 본회를 해하는 모습, 그리고 본회에 속한 노회와 총회 총대가 서로 경쟁하고, 어떤 안건에 대해 충돌하는 모습이다. 본회에 속한 노회와 회원들은 “본회의 친목과 권익보호와 육성 협조”를 위해 서로 보호하고, 서로 세워주고, 어려운 문제를 당한 노회와 회원의 문제를 총회 내에서 적극적 해결해 주어야 한다.
2) 서북지역노회협의회 내에서의 역할
서북협 내에서의 역할은 북한 서북의 올곧은 신앙 정체성을 유지한 지역노회협의회체로 소속 노회 간의 상호 교류와 친목 증진을 수행하는 역할이다. 사실 협의회는 교단 내 결의나 정책을 수립하는 법적 권한을 가진 단체가 아닌 친목 단체이다. 더욱이 각 노회는 무지역노회로서 교회가 전국에 산재해 있다. 이에 지역을 배경으로 한 다른 지역노회협의회보다 그 단합과 결집력을 추구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본회에 속한 노회와 교회, 그리고 목회자는 서북협이 단순한 행정 교류 차원을 넘어 신앙적 동지로 인식하도록 서북의 역사정 정체성을 일깨워 결집케 하며, 노회와 목회자들에게 목회와 신앙적 유익을 끼쳐야 한다. 본회는 42개 노회와 4,000여개의 교회가 소속된 거대 지역노회협의체로서, 각 노회와 교회에 풍부하고 다양한 신앙적 자산과 목회적 노하우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노회들이 주기적으로 모여 목회적 고민을 나누고, 다양한 목회적 경험과 지혜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본회는 각 노회에서 활동하는 목회자들이 서로의 경험과 노하우를 교환하고,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위로하며, 영적 지지와 격려를 제공하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회에 속한 노회가 평안하고 교회는 부흥하는 영적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회 산하에 있는 수양회분과위원회와 체육분과위원회가 이런 상호 교류와 친목을 이루는 플랫폼이 되어, 회원들의 신앙적 유익과 하나 됨을 위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3) 서북지역노회협의회의 북한선교에 대한 역할
서북협은 북한 서북의 역사적 정체성을 가진 지역노회협의체로서 북한선교의 선봉에 서는 역할을 가진다. 사실 1988년 서북협의 직접적인 설립 목적이 총회 총대 활동을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조직된 모임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협의회가 총회 정치 구도를 위해서만 운영된다면, 지역 기반을 북한 서북에 둔 무지역노회들로 구성된 서북협은 그 역사적 정체성을 망각한 기조일 것이다. 한국교회역사 자료박물관 관장인 장영학 목사는 협의회 조직의 근본적인 목적은 “이미 전국적으로 지역 협의회인 호남협의회와 영남협의회, 그리고 충청협의회가 조직이 된 시기에 당시 통일을 위해 기도하면서 두고 온 북한지역의 노회를 재건하여 활동하던 무지역 노회들이 서북지역노회협의회를 조직한 것”으로 밝힌다. 여기서 우리는 서북협의 존재적 정체성을 생각할 수 있다. 서북 지역의 월남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남한에 있는 기존 노회에 속하지 않고 따로 서북협을 따로 조직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조직한 협의회를 굳이 “서북지역노회협의회”라고 이름을 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분단 후 두고 온 서북지역의 교회와 노회의 전통을 지키고, 통일되어 북한 길이 열리면 다시 교회가 있었던 자리에 교회를 재건하고, 노회도 그대로 재조직하기 위하여 노회 명칭을 과거 북한에서 사용했던 그대로 평양노회, 안주노회, 황해노회, 함북노회, 함남노회, 평서노회, 등등으로 고집(?) 있게 보존한 것이다. 또 개 교회적으로는 “산정현교회”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비록 산정현교회가 교회 자체의 사정에 따라 서북협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산정현교회는 북한 평양에 주기철 목사님이 목회하셨던 산정현교회 출신의 장기려 장로가 남한으로 피난하여 세운 교회로써 북한에서 사용했던 이름을 남한에서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북한에 두고 온 교회의 전통을 남한 땅에서 순수하게 지키고, 다시 북한 길이 열리면 평양 산정현교회의 자리에 산정현교회를 재건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서북협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근간은 정치적인 총회 섬김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통일된 한반도 시대에 북한에 올라가 복음화하는 북한선교에 있다. 사실 협의회는 무지역 노회의 구성체라는 이유로 지역 노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해체까지 거론되는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일례로, 제99회 총회(총회장 백남선 목사)에서 “삼산노회장 윤남철씨가 헌의한 서북지역노회협의회에 가입한 지역노회 환원 지시 요청의 건”이 헌의된 예도 있다. 다행히 그 헌의안을 자진 철회하여 각하하기로 가결되었지만, 총회가 잃어버린 북한 서북을 연고로 하는 무지역노회인 서북지역노회협의회를 계속 존치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코 총회 정치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북한 길이 열리면 협의회가 총회에서 북한교회 재건에 주도적으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미션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협의회의 존재 이유는 통일 후 북한 서북지역에 교회 재건과 노회 재건을 통한 북한 복음화를 이루어야 하는 북한선교의 역할 때문이다.
이에 서북협은 북한 서북에 뿌리를 둔 지역노회협의회로서 북한선교에 대한 정체성을 잊지 않고, 북한 선교의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북한선교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두고 있다. 처음에는 북한선교위원회라는 명칭이 아니었다. 2021년 제33회 김동관 목사 회장 때에 북한선교와 관계된 “탈북민위원회”를 처음 발족했다. 그동안 협의회 산하 특별위원회는 회원들의 친목과 단합을 위하여 회원 부부 수양회를 주관하는 “수양회분과위원회”와 노회 대항 체육대회를 주관하는 “체육분과위원회” 뿐이었다. 그런데 33회기, 즉 협의회 설립 33년 만에 협의회가 서북 출신이라는 역사적 정통성을 기억하고, 미력하나마 북한선교에 동참하고자 협의회 내에 “탈북민분과위원회”를 둔 것이다. 33회기(회장 김동관 목사) 1대 위원장 정영기 목사, 34회기(회장 김진하 목사) 2대 위원장 김정호 목사, 35회기(34회기 김상윤 목사) 3대 위원장은 황석산 목사는 탈북민위원회라는 명칭대로 위원회의 우선적 사역과 그 대상은 탈북민이었다. 위원회는 통일준비포럼을 통하여 탈북민 교회의 열악한 현실을 파악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탈북민 교회 목회자를 선별하여 격려금을, 그리고 탈북민 출신 신학생과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역에 주력했다. 그런데 2024년 36회기(회장 장순직 목사) 4대 위원장 설동욱 목사는 기존의 명칭 “탈북민위원회”를 “북한선교위원회”로 변경하였다.
북한선교위원회는 협의회의 북한선교를 주도적으로, 그리고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탈북민위원회에서 북한선교위원회로의 명칭 변경은 협의회가 북한선교에 대한 역할을 보다 강화하고자 하는 차원으로, 북한선교위원회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첫째. 협의회 내의 42개의 노회와 4,000여개의 교회가 서북협의 북한 서북에 대한 역사적 정체성을 일깨워 북한선교에 관한 관심을 일으키는 역할이다. 북한선교는 통일에 대한 의식이 있는 소수의 목회자와 교회가 감당할 일이 아니라, 협의회 내의 노회와 교회는 북한선교에 대한 역사적 부채 의식을 갖고 북한 땅에도 복음 전파에 힘쓰도록 해야 한다. 둘째, 협의회 내의 통일 준비 역할이다. 어느 날 갑자기 북한의 문이 열렸을 때, 갑자기 북한 복음화를 위한 교회 재건과 사역자를 준비한다면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위원회는 통일 전후에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 교회를 재건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사역자 양성에 후원하고 준비해야 한다. 셋째, 지교회가 탈북민들을 영적으로 돌보고 성장시키는 통일 목회의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역할이다. 탈북민은 ‘먼저 온 통일’이다. 따라서 북한선교위원회는 협의회 내의 교회가 통일을 위한 염원과 기도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탈북민 성도들과 이질감 없이 신앙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궁극적인 북한선교는 북한교회 재건이다. 분단 전까지 북한지역에 있었던 교회는 3,000여개로 본다. 그러나 통일 후 북한 땅에는 몇 곱절 수의 교회가 더 필요하다. 사실 북한교회 재건은 한국교회와 교단 총회가 주관해야 할 일이지만, 무엇보다 직접적인 사명은 북한 서북을 배경으로 한 서북협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북한선교위원회는 분단 당시의 북한교회를 기억하고 있는 월남민 1세대와 2세대를 통해, 북한교회의 위치를 각각 확인하고, 협의회 내 노회와 교회와 해당 교회를 건축하거나 후원하도록 북한교회재건 매칭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북한선교위원회는 이를 관리하고 매칭된 교회가 계속해서 북한교회 재건을 위해 기도하고, 재정을 확보하여, 통일 후에 마침내 교회 재건의 사명을 성취한다.
III. 나가는 글
서북협은 북한 서북에 뿌리를 둔 무지역노회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42개 노회와 4,000여 개의 교회들로 구성된 지역노회협의회로서 북한 서북의 역사적 정체성 토대 위에서, 첫째, 총회 내에서 영향력 있는 역할, 둘째, 속한 노회 간에 친목과 유익을 끼쳐 서북협의 하나 됨을 공고히 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셋째, 서북협은 월남민 1세대와 2세대의 감소로 꺼져 가는 북한선교에 대한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하는 북한선교, 아니 통일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장작더미의 역할을 갖는다. 따라서 본회는 북한선교에 뜻을 모아 탈북민을 돕고 신학생을 후원하고 탈북민 교회와 협력하며, 통일 후 북한교회 재건도 능히 감당해야 한다는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