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제언] 코로나 19 사태와 주일 예배 중단 문제에 관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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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제언] 코로나 19 사태와 주일 예배 중단 문제에 관한 제언
  • 개혁타임즈(Reformed Times)
  • 승인 2020.03.01 21: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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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중세 가톨릭은 신앙으로 이겨야 한다며
온 신도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였다.
유럽 인구 2400만 명이 죽었다.

종교개혁 시대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루터는 그곳에 오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미국에서 서부의 금을 찾아가는 골드러쉬 때,
복잡한 예전이나 형식, 예배 요소들을 과감히 제거한다.
지금은 자동차 안에서, TV 앞에서, 스마트 폰으로 예배한다.
자연스럽게 편의주의, 무교회주의로 빠진다.

기독교 예배는 공동체성 내포,
예배형식 변경이 자칫 전체 공동체에서
이탈의 빌미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는 말자.

 

조상원 교수(광신대 예배학)
조상원 박사(Ph.D, 광신대 교수)

지금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인하여 모두가 불안해합니다. 확진자가 급증하는 진원지가 다름 아닌 신천지 이단 집단이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부각 되어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정부와 질병관리본부, 그리고 지자체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종교모임이나 예배를 잠정적으로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경남 김경수 지사는 현 시간부로 신천지 종교시설에 대한 폐쇄 및 집회 금지 행정명령을 발동했습니다. 아울러 일반 교회의 집회도 금지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특별한 상황 속에서, 정부나 지자체장의 행정명령에 따라 예배를 중지해야 하는지, 혹은 그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예배를 강행해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합니다.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 “예배 문제 때문에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총신대 신학위원회에서 “주일예배형식”에 관한 제언을 했는데, 이해하기 쉽게 잘 제언을 했습니다.

 

필자는 예배학자로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주일예배형식과 아울러 주일 예배형식을 변경하는 보편타당한 근거를 정리하여 제언하려고 합니다. 먼저, 예배의 기본원리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나서, 이런 특수한 상황 속에서, 예배에 관하여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를 제언하려고 합니다. 필자가 개혁타임즈의 부탁을 받고, 14세기에 전 유럽을 휩쓸어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인 24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페스트와 관련된 영문자료들(thesis, articles, books)을 찾아 번역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교회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했는지와 그 특수한 상황에서 파생한 다양한 문제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왕성교회(담임 길요나 목사) 예배 모습
왕성교회(담임 길요나 목사) 예배 모습

 

[1] 기독교예배의 근본 원리

기독교 예배의 기본원리가 몇 가지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예배형식과 관련된 한 가지 원리를 다루려고 한다. 

 

1.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전체 공동체가 하나로 연합하여 함께 하는 협력적 행위가 필수적이다(a corporate activity is essential). 

예배는 동떨어진 개인들의 행위가 아닌 교회 전체의 행위이다. 예배학자 Franklin m. Segler 교수는 ‘예배공동체’를 특별한 의미를 담아서 표현했는데, ‘a worshipping organism(예배하는 유기체)’과 ‘a divinely created organism as the body of Christ(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거룩하게 창조된 유기체)’라고 공동체성을 강조하여 잘 표현하였다. 예배는 그냥 개개인이 예배시간에 모인 것이 아닌, 온 공동체 구성원들이 협력적이고, 서로 상호적이고, 그리고 집합적인 연합체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가 어떤 때인가? 극단적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시대정신이 되어버렸다.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한다. 점점 공동체 의식이 희미해져가고 있다. 그런데도, 기존 교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함께 하는 연합공동체를 회복해야만 한다. 마음이 흩어지고, 바라보는 관점이 흩어지고, 그리고 몸이 흩어진 상태에서 그저 모였다가 의식이 끝나고 뿔뿔히 흩어지는 공동체는 진정한 예배공동체가 아니다.

 

2. 모든 기독교예배는 ‘예배의 공동체성’을 갖는다. 

기독교 예배는 전체로서의 공동체성(worship in the community as whole)을 항상 내포한다. 사도행전에서도 모든 모임과 예배에는 항상 공동체성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행2:46). 바울 서신의 여러 부분에서도 ‘공동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서의 여러 부분에서 ‘공동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공동체성’이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the same mind)하여 ‘같은’ 사랑(the same love)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one mind)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1-4)

 

시편에서도 역시 예배공동체의 공동체성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우리’(we)라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였다.

 

“오라, 우리가(let us)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let us)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오라 우리가(let us)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let us worship and bow down)”(시95:1-2, 6)

 

구약의 예배에서도, 역시 ‘공동체성’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위의 시편에서 ‘굽혀 경배하는 동작’과 ‘무릎을 꿇는 동작’은 구약 예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제스처를 동반한 예배의 자세이다. 구약의 예배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예배는 개개인이 아닌 전체공동체의 연합을 도태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에서는 더욱 엄숙한 언어로 예배의 우주적 연합과 그 공동체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let us offer to God acceptable worship)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12:28-29)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니리까 오직 주만이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게 경배하리이다 하더라(All nations will come and worship you)”(계15:4)

 

‘우리가’(예배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히12:28). 요한계시록에서는 ‘만국’(all nations)이 함께 예배하는 날이 도래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전체로서의 공동체성’ 안에서, 우리의 전 존재를 드리는 헌신의 마음과 자세가 없는 예배는 메마른 형식적인 예배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전의 마당만 밟았던 과거 이스라엘 백성의 전철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배의 유기적 공동체의 전체 안에서 서로에게 소속한 개개인의 예배자는 예배 공동체의 연합정신을 항상 유념하면서 나의 전 존재를 다 하여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온전한 예배이다.

 

3. 예배자들은 예배언약으로 부르심을 받는 언약 백성임을 기억해야 한다.

시편 50편에서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을 향하여 명령하신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나와 제사로 언약한 이들이니라(시50:5)”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이것은 준엄한 예배명령이다. 이 예배명령에 타협이나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언약하다” 히, “כרת(karat)”인데, “언약하다/자르다”의 의미이다.

“성도들은 제사(예배)로 나와 언약한 자들(כרת-짐승 몸을 반으로 가르고 두 언약 당사자가 지나간다)”이라고 명시한다. 성도가 누구냐? 그 정체성이 예배하는 자들이다. “제사” 히, “זבח”(jebahe)인데, 예배용어로 “희생제사”, “희생제물”을 뜻한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영광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예배에는 반드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한다.

 

요즘 현대교회 그리스도인이 예배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배의 타락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살면서 하나님이 나의 예배를 받으신다 생각지 마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예배이다. 물론,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사의 축제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는 위대한 사건이요 전 우주적인 이벤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과 감격과 치유와 회복과 영광을 누리기 전에 예수의 피뿌림을 받아야 한다.

 

히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예배가 살길을 결정)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자, 구약예배현장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한번 가보자! 상상력을 동원해서 예배현장을 그려보라. 수많은 소와 양들이 울부짖고 있고,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피가 튀기고, 짐승들이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멱을 따고, 가죽을 벗기고 태우는 역겨운 냄새들이 진동한다. 구약 예배현장은 온갖 죄의 냄새가 진동하는 자리, 죄를 처리하는 현장이 예배의 현장이다. 몸부림치는 짐승들의 온갖 죽음의 소리와 냄새들이 가득한 곳이다. 죄 지은 사람들이 짐승을 끌고 와서 그 짐승에게 안수하고 그의 죄를 전가하고 그 짐승을 처참하게 멱을 따고 죽인다. 그 처참하게 죽어가는 짐승은 곧 죄 지은 자신이다. 그 죽어가는 양의 모습에서, 자기의 모습을 보고 치를 떨어야 한다. 다시는 이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 죽어가는 양의 떨리는 목소리,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면서, 몸을 떠는 그 양을 보면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기독교 예배의 근본 원리 중 하나인 “유기체로서 예배공동체”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원리가 모든 기독교예배의 근본적인 관점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14세기 페스트에 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응과 대처, 그들의 예배와 집회

14세기 발생한 죽음의 전염병 페스트와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응과 대처, 그리고 파생한 문제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필자는 주로 이와 관련된 영문 논문과 자료들을 번역하였다.

14세기 흑사병 페스트 바이러스가 퍼져나갈 때, 사람들은 혼란과 공포에 휩싸인다. 걸리면 몸에서 열이 나고, 피부가 괴사하고, 피를 토하면서 3일~5일 사이에 죽는다.

당시 페스트로 유럽 인구 2400만 명이 죽었다. 전체 인구의 절반이 죽은 셈이다. 얼마나 무섭고 소름 끼치는가? 그 당시에는 약도 전혀 효과가 없었고, 의사도 손을 쓰지 못했다. 유럽의 페스트가 영국으로 들어왔는데, 4명 중 1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필자가 한때 살았던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그 무서운 전염병이 돌 때, 희귀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유럽 분위기는 페스트는 타락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 죽어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기도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는 두려워서 양의 피를 바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마녀를 찾아가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어차피 죽을 걸 먹고 마시고 즐기다 죽자” 하면서 방탕에 빠지기도 했다.

페스트의 확산이 5년이나 지속 되었다. 시체를 두려워 매장하지 못해 길거리에서 시체들이 썩어갔다. 사람들은 그런 세상을 목격하며, 지상에 지옥이 생겼다고 말했다.

 

1. 그러면 당시 교회들과 도시와 지역관리들을 페스트를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했는가?

페스트를 방어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세 가지를 시도했다.

1). bloodletting(몸에서 피를 빼는 것) 2). prayers(수도원이나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 3). concoctions(여러 종류의 내용물이 들어간 칵테일을 마셔 몸에 열을 내게 하는 방법). 그런데, 이러한 시도들이 효과가 없었다.

페스트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때, 로마 가톨릭교회는 전혀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의 증오와 비난을 샀다. 당시 페스트는 오늘날의 사스나 코로나와는 그 위력이 전혀 달랐다. 감염되면 3일에서 5일 사이에 온몸에 악종이 나고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 한 가족이 한꺼번에 죽기도 하고, 친척이 죽어도 그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기를 꺼렸다. 교구교회는 재앙의 시기에 비즈니스를 하여 많은 돈을 축적하였는데, 사제가 장례 집례를 하는 비용을 로마 가톨릭교회가 거둬들였다. 그로부터 200여 년 후에는 면죄부를 파는 엽기적인 행위를 자행하였다.

 

2. 금욕주의자들(Flagellants)의 무지함과 페스트 전파

페스트는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해석을 받아들인 금욕주의자들이 종교운동을 결성하여 행동에 나섰다. 북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들은 하얀 옷을 입고 맨발로 다녔으며 몸을 씻지 않고, 채찍을 만들어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였다. 그런 행위는 회개의 행위로 간주하였다. 이들은 자기들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과 일체화하여 의식을 집행하였다.

그들의 탈선은 페스트를 퍼뜨린 책임 전가 대상자를 찾아 응징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표적이 되었는데, 그들은 무려 12,000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유럽인들보다 발병률이 낮은 유대인들이 샘에 독을 탔다고 모함하였다. 사실, 유대인들은 유대인 정결 의식 전통을 지켜왔기 때문에 항상 식사 전에 손을 씻었다. 위생상태가 좋은 그들에게 감염률이 낮았던 것을 오해하고 죽인 것이다. 후에 금욕주의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이 교만한 금욕주의자들로 인하여 페스트가 유럽에 쉽게 퍼져나갔다. 그들은 유럽의 여러 지역의 도시들을 단체로 돌아다니면서 금욕주의 의식을 행하였기 때문에, 페스트가 쉽게 전파되었다.

 

3. 로마 가톨릭교회의 페스트에 대한 무지한 반응과 대처

당시 유럽 사람들은 페스트를 하나님이 교만하고 타락한 인간에게 내린 형벌로 이해하고 해석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와 수도원으로 몰려들어 기도하였다. Konrad von Megenburg는 당시 사람들이 너무 타락하고 죄가 넘쳐나서 하늘에까지 올라갔으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페스트로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페스트를 예방하기 위한 몇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1). 사람들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것을 법으로 법제화하여 어긴 사람에게는 벌금을 부여했다.

2). 리넨(아마직물)과 울 종류의 수입을 금했다. 천 수입을 통한 바이러스의 유입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규제한 것으로 보인다.

3). 모든 시신은 손대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나무 관을 제작해서 관에 넣기 전까지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는 규정이다. 시체를 만짐으로 감염되는 것을 막으려고 한 조치로 보인다.

4). 모든 시신은 2.5 미터 깊이의 도랑에 묻도록 규정했다. 깊이 묻어서 감염을 차단하고자 한 조치로 보인다.

5). 시신이나 죽은 사람이 전에 살았던 집에 가지 않도록 규정했다.

6). 죽은 자에게 선물을 얹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식사제공을 금지하였다. 감염 방지를 위한 조치로 보인다.

7). 죽은 자의 부인, 즉 과부를 위로하기 위해 그 집 밖에 어떤 형태로든지 모이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런 조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페스트는 더욱 위력을 떨치면서 퍼져나갔다. 왜 그랬을까? 중세 가톨릭이 전염병을 신앙으로 이겨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온 신도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였다. 거기에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면 죽음의 사신이 건너간다는 미신적이고 말이 안 되는 의식을 행하였다. 위생 상태가 안 좋은 상태에서 짐승의 피까지 발랐으니 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좁은 예배당에 사람들을 모아서, 한꺼번에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번진 것이다.

당시에 수도원이 성행하였는데, 사람들이 페스트가 두려워 기도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몰려들었다.  비좁기도 하고 위생상태가 좋지 않은 곳에 수많은 사람이 운집하였기 때문에 페스트가 쉽게 동시다발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2백여 년 후, 종교개혁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비텐베르크에 흑사병이 발병하여 수많은 사람이 피신을 떠났다(1527년). 루터의 집은 원래 수도원 건물이었기에 숙소로 사용되면서, 많은 환자가 머물러서 치료를 받았다. 루터가 “치명적인 흑사병으로부터 도망해야 하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루터는 감염을 우려하여 성직자들에게 그곳에 오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아마도 14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페스트가 창궐할 때, 한곳에 모여 미사를 집행하여 많은 사람이 감염되어 죽은 사실을 기억했을 것이라고 추측 할 수 있다.  

 

[3] 현재의 특수 상황에서, 주일예배형식 변경의 합당한 근거 제시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예배형식을 바꿔서는 안 된다고 본다. 정부나 지자체가 강요함으로 예배형태를 영상이나 가정예배 형태로 바꿔야 하는가? 그것이 예배형태를 바꾸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현재의 특별한 상황 속에서, 예배형태를 변경해야 하는 보편적 수용이 가능한 몇 가지 근거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생명을 살리는 생명윤리가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3:4)

이 말씀을 근거로 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코로나 19에 감염되어 교회 공동체 다른 교우들에게와 혹은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와 이웃들에게 감염을 시킨다면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된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율법의 조항보다 더 우선된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늘 갈등하고 부딪히는 이유가 바로 관점의 차이였다. 그들은 그저 율법의 조항을 지키는데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생명을 세우고 살리고 치유하는데, 목적을 두셨다. 이런 근거에서, 우리는 이 비상시국에서 다른 형태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본다.

 

2.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기준에 의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9). 만약 그리스도인으로서 코로나 19에 감염이 된 상태로 예배하다가 다른 성도나 혹은 자기가 거주하는 지역의 이웃들이나 직장, 여타의 지역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전염시킨다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지금 기존의 형태와 다른 예배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본다.

 

3. 건덕의 실천으로써 예배형식의 변경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신천지 사이비 추종자들의 행동이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있다. 그들이 기존 교회에 침투하여 감염확산이 광범위하게 번질 경우, 교회가 신천지를 받는 눈총과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감염이 염려되는 이런 비상시국에 교회에 예배형태를 변경하여 영상이나 기타 여러 방편으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이웃들에게 평안을 주고 덕을 세우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4] 편의 주의과 무교회주의 경계

특별한 상황 속에서 변경된 형태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부작용이나 부정적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1. 미국 프런티어 예배전통에서 시작된 실용주의 예배 경향 곧 편의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동부에서 서부의 금을 찾아가는 골드러쉬가 한창일 때, 미국교회는 복잡한 예전이나 형식, 예배 요소들을 과감히 제거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감성을 자극하는 변경된 형태의 실용주의 예배 흐름을 만들어 갔다. 프런티어 천막 교회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이면서 가장 간단한 예배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부흥회 스타일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감성에 호소하는 감정적 예배 전통이 만들어진다. 후에 로버트 슐러가 시작한 전형적인 실용적 혹은 편의주의 예배를 보면,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와 TV 앞에서 예배한다. 여행 가서 라디오나 스마트 폰으로 예배를 드린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편의주의, 무교회주의로 자기도 모르게 빠질 수 있다. 교회에 안 나가도 집에서 예배하니까 남의 눈치도 안 보고, 사람들과 부딪힐 일도 없고, 힘들게 헌신도 안 해도 되고……! TV 틀면 온갖 설교가 다 나오니 자기 취향 따라 듣고 예배한다고 하면 어떻게 그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요즘 젊은 세대들은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훈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예배 생활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이런 변경된 예배형식 변경이 자칫 전체 공동체에서 이탈의 빌미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는 말자.

지금 한국교회는 실험대에 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배 문제는 생사의 문제이다. 많은 기도와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 참고 문헌 ================================

1. Gordon Lathrop, What Are the Essentials of Christian Worship: Worship Series 1, (London: IVP, 1994),

2. Raymond Abba, Principles of Christian Worship: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Free Church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0)

3. R. Akehurst and R. W. F. Wootton, Inter-Faith Worship: Grove Booklet on Ministry and Worship 52 (Nottingham: Grove Books, 1977)

4. W. D. Maxwell, Concerning Worship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48)

5. Winward, The Reformation of Our Worship (London: The Caley Kingsgate Press, 1963),

6. 조상원, [예배는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광주: 도서출판 디자인상상, 2019)

7. Sang Won Cho, The Study of the Pragmatic Factors in Korean Church Worship and Its Liturgies (Wales UK, 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Wales, 2011)

8. J. P. Byrne, The Black Death (CT, Greenwood Press, 2004)

9. Center for Medieval Renaissance Studies, Viator, Volume 5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5)

10. R. Horrox, The Black Death (UK,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4)

11. S. Hatty and J. Hatty, The Disordered Body: epidemic disease and cultural transformation (NY, SUNY Press, 1999)

12. L. C. Stavicek, The Black Death (NY, Infobass Publishing, 2008)

13. J. Vidmar, The Catholic Church through ages: a history (NJ, Paulist Press, 2005)

14. C. Stewart, The Catholic Church: A Brief popular History (St. Mary’s P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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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원 박사

조상원 박사는 예배학으로 영국에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개신대학원대학교(구, 개혁신학연구원, M.Div)
미, City University of Seattle(Bs.C)
영, University of Wales, Trinity Saint David(Ph.D), 예전 및 예배학 전공
현, 광신대학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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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편집부의 견해와 다소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반론이나 기타 의견을 주시면 적극 반영하여 게재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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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민 2020-03-02 21:04:26
동의합니다. 예배의 본질 되새겨봅니다!
응원합니다. 예배는 금전이 아닌 생명구원의 근본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여호와 라파의 은혜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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