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논단] ‘유아세례’의 ‘어린이 세례’로의 확장을 위한 제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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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논단] ‘유아세례’의 ‘어린이 세례’로의 확장을 위한 제언(1)
  • 개혁타임즈(Reformed Times)
  • 승인 2020.05.17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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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에서는 5월을 맞아 총회적인 관심사 중 하나인 어린이 세례의 이해와 목회적 필요성을 감안해 유아세례 개정 연구 위원회의 「‘유아세례’의 ‘어린이 세례’로의 확장을 위한 제언」을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본 교단에서는 유아세례 개정안을 제102회 총회에서 허락받았고, 총회헌법개정위원회로 이첩됐다. 이어 전국 노회의 수의 절차를 밟아 제103회 총회에서 유아세례안이 개정되었음을 선포했다.

본고는 유아세례의 중요성을 전재로 세례의 공백기를 없이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유아세례의 어린이 세례로의 확장에 대한 제언’을 현실적 상황과 목회적 상황 그리고 선교적 상황을 고려

어거스틴 이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모두 유아세례는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

칼뱅의 유아세례는 재세례파와의 논쟁을 통해 더욱 견고하게 발전
“세례를 받은 어린이들 안에서 성령께서는 역사하신다.”

 

본글은 '유아세례개정연구위원회'* 서기를 맡아 본 글을 집필하고 어린이 세례의 개정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했던  

김한성 목사(현 총회 부서기)의 허락을 받고 연재됨을 밝힙니다.

 

총회 임원회에서의 부서기 김한성 목사 모습
총회 임원회에서의 부서기 김한성 목사 모습

 

Ⅰ 들어가는 글

 

1. 연구의 목적

본 연구는 총회 헌법을 근거로 하여 각 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유아세례에 대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거나 특별한 방법을 제안하고자 함이 아니라, 유아세례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함은 물론 유아세례를 어린이 세례로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개혁주의 교회는 성경을 근본으로, 칼뱅의 가르침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문답서를 중심으로 하여 그 신학적 체계를 이루어 가고 있는 바, 그 가르침에 의하면 세례는 단순히 죄 씻음의 의미를 넘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하나님나라 공동체의 영입을 의미하고 있음1)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세례의 대상자가 유아들을 제외시키지 않는다는 것2)을 전재해 볼 때 총회 헌법이 강조하는 유아세례의 연령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명분을 얻는다. 왜냐하면 현행 헌법의 헌법적 규칙3)에 의하면 유아세례의 대상자가 만 2세로 제한되어 있기에 그 이후 만 14세4)에 입교할 때 까지, 3세부터 13세까지의 어린이들은 그 중요한 세례의 참여에서 제외되는 세례의 공백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본고는 유아세례에 대한 반대적 입장을 대변하거나, 새로운 견해를 제시함이 아니라, 유아세례의 중요성을 전재로 하되 오히려 유아세례의 중요성을 더욱 강화하여 ‘만 2세 이하’로 규정되어 실시되고 있는 유아세례를 어린이 세례(만 13세까지)로의 확장을 이루어서 세례의 공백기를 없이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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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송종완 목사가 위원장으로 김한성 목사, 김경철 목사, 강문구 목사, 주광주 장로가 위원으로 위원회를 섬기고 있다. 본 논문은 학술적 목적으로 연구된 것이라기보다는 유아세례의 어린이 세례로의 확장을 위한 제언을 하고자 준비된 논문으로, 위원들의 공동연구를 근거로 하였으나 김한성 목사(서울강서노회소속)가 여러 학자들의 선행 연구들을 인용하여 연구하되 일정 부분은 편집에 가까운 정리를 하였음을 밝힌다. 

1).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n two volumes, Edited by John T. McNeill, chap. xv,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7.) 1303-1323. 칼뱅(J. Calvin)은 그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에서 세례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중 중요한 몇 가지를 요약하자면, 첫째는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씻긴다는 것(Baptism as Token of cleansing for the whole of life)을 의미하고, 둘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워진다는 것(Baptism as token of mortification and renewal in Christ)을 가르치며, 셋째는 고백의 표로서(Baptism as token of confession) 이로 인하여 세례 받은 이들로 하여금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세례(Baptism as conforming faith)라고 설명함으로서 사람들 가운데서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증거가 된다고 강조하는데,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Baptism as token of our union with Christ)이라고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 신앙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8장 1항은 세례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신약의 성례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65문답과 소요리 문답 94문답에서도 그대로 확인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 가운데 제정하신 성례들은 몇 가지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 68에 대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역시 성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곧 세례와 성찬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곧 유아세례의 의미를 살피기 위하여서는 성례란 어떠한 것인지를 바르게 이해할 것을 필요로 함을 말해준다. 참고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총회 헌법에는 성경 소요리 문답이라고 명시되어 있음) 제94문 ‘세례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세례는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성례인데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합됨과 은약의 모든 유익에 참여함과 주님의 사람이 되기로 약조함을 표시하여 인치는 것이다(What is baptism? Baptism is a sacrament, wherein the washing with water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Ghost, doth signify and seal our ingrafting into Christ, and partaking of the benefits of the covenant of grace, and our engagement to be the Lord's.)라고 하여 이 내용은 바로 칼뱅의 가르침과 동일한 것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Ⅱ. 성경 소요리문답, 문94”, 헌법, 52. 
2). Ibid., chap.ⅹⅵ를 보면 유아세례에 대해 “Infant Baptism Best Accords with Christ’s Institution and the Nature of the Sign” 이라 하여 유아세례를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임과 표식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된다고 설명했다. 1324-1359 참조.
3).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V. 헌법적 규칙 제 6 조 성례 제 2 항”, 헌법에 “만 2세까지 유아세례를 줄 수 있으되 부모 중 한 편만이라도 세례교인이면(혹은 입교인이면) 줄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4). Ibid., 3항 “유아세례를 받은 자가 만 14세 이상이 되면 입교 문답할 연령이 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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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행 연구

현재 유아세례에 대한 많은 연구5)가 이루어져 있지만 본고에서는 그 다양한 내용을 생략하고 유아세례의 연령(만 2세 이하)의 확장의 필요성을 논하는데 국한하고자 한다. 이렇게 범위와 내용을 제한한다 하더라도 현재 군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세례6)와 장애인들 위한 세례의 정당성7)을 논한 학자들의 선행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현행하는 제도(만 2세 이하)를 넘어서 세례의 공백기라 할 수 있는 3세에서 13세까지의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준다고 가정 할 때 다음의 이슈는 매우 중요한 논점이 되기 때문이다. “과연 그 연령에 해당하는 어린이들이 본인 스스로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까?”와 “그들의 고백에 진정성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이 유아세례의 확장을 위한 일에 걸림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본고에서는 군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례의 진정성 여부 및 의지적이고 이지적인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적, 정신적 장애인을 위한 세례의 타당성을 논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하여 총신대 교수인 최홍석의 ‘유아세례의 신학적 정당성’(신학지남, 제71권 1집, 2004, 40-82)과 이를 근거로 하여 같은 학교 교수인 정승원이 논한 ‘지적 장애인 세례의 신학적 정당성’(신학지남, 제82권 3집, 2015, 63-83)은 많은 도움을 준다. 그 외에 조용선 ‘어린이세례를 통한 기독교 교육적 가능성 모색’(장신논단, 41, 367-391)과 노학용, 김상구가 공동 연구한 ‘예배문헌에 나타난 유아세례 이해와 활성화 방안’(복음과 실천신학 제25권 2012 봄호 94-129) 등이 선행 연구된 논문들이고, 비록 석사 논문이었지만 장신대학교의 석사 논문으로 이현민의 ‘어린이(아동)세례의 타당성 연구: 신학적 역사적 고찰을 중심으로’(서울: 장신대학교 2016)는 통합교단의 헌법에 나타난 유아세례 연령 확정과정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한 수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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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5). 유아세례에 대한 찬반양론이 팽배하다. 특히 침례교단이나 재세례파는 물론이거니와 복음주의의 계열에 있는 학자들 중에도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서울신학대학교 교수인 조갑진이 그이다. 그는 그의 ‘신약에서의 유아세례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이전의 헌아식을 유아세례로 전환한 성결교단의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였다.)도 있다. 그러나 본 논문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은 일일이 열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유아세례를 이미 성경적으로 규명하여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6). 현실적으로 군 부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례는 매우 고무적이고 위대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주님의 지상명령인 마28:18-20절을 성취하는 매우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군부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세례의 역기능은 있어왔다. 힘들고 분주한 일정에서 이루어지는 세례 전 신앙교육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간식(이른바 초코파이)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세례에 참여한 병사들이 많은 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군부대가 황금어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다소간의 역기능적인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병사들이 많다는 것과 그들의 세례 받음은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다.
7). 지적 장애인들에게 행하는 세례는 유아세례의 어린이 세례로의 확장을 주장하는 것에 매우 큰 의미를 준다. 왜냐하면 지적장애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연령적으로 보았을 때는 성인이나 지적 상태는 유아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지도 못한다. 그를 돌보는 이의 도움을 받아 결정해야만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어른이나 정신적으로 유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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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구 방법 및 절차

재차 강조하는 바이지만 유아세례의 다양한 연구들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그 중요성은 본고에서 다루지 않아도 이미 인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논문에서 중점을 두고 다루고자 하는 것은 만 2세로 규정된 부분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하여 이 본 연구에서는 성경적, 신학적으로 유아세례의 타당성을 약술하고 이어서 선교 초기 한국 교회에서의 유아세례 현황을 제시함으로 만 2세로 규정된 부분을 개정할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유아세례라 할 때 사용되는 유아(Infant)는 흔히 1, 2세를 의미 하지만, 영국에서는 7세까지의 아이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법률적으로는 생후부터해서 18세 이하까지 적용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미성년과 초심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되어 사용하고 있다.8)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막10:13-16에 나오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셨을 때 사용된 단어인 ‘어린아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준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어린아이(Infant)는 TDNT9)가 소개하고 있는 파이디온(παιδίον), 테크논(τεκνον), 브레포스(βρέφος),를 비롯하여 네피오스(νήπιος) 등의 단어인데, 상기의 구절에서는 ‘파이디온’이 쓰여 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파이디온’10)은 영아를 의미하는 ‘브레포스’11)와 ‘테크논’12) 그리고 주로 1, 2세를 의미하는 ‘네피오스’13)와 구별되어 사용하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유아세례’라고 할 때 굳이 2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강조해야 할 특별한 명분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본고는 순서에 따라 ‘세례’에 대한 일반적(성경적, 신학적)인 내용들을 의미를 살펴보고, 이어서 ‘유아세례’에 대해 보다 심도 있게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특히 ‘유아세례의 어린이 세례로의 확장’을 위하여 ‘어린아이’에 대한 의미를 성경적으로 접근을 하게 될 것이고, ‘만 2세’로 정해진 시기에 대해 역사적으로 접근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선교역사에 있어서 유아세례의 실재를 유서 깊은 교회들의 세례교인 명부를 통해 확인하고 난 후, 이에 근거하여 ‘유아세례의 어린이 세례로의 확장에 대한 제언’을 현실적 상황과 목회적 상황 그리고 선교적 상황을 고려하여 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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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8). The Random House College Dictionary, 681.
‘Infancy’. Law.com Legal Dictionary. Law. com. Retrieved 2015-09-30. 에 의하면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In British English, ‘infant’ is a term that can be applied to school children aged between four and seven. As a legal term, ‘infancy’ continues from birth until age 18.
9). G. Kittel, G.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78) Vol. V., 636-654 참조.
10). Strong's Concordance에 의하면, ‘παιδίον’은 a young child(a little child, an infant, little one./소년, 소녀)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는 TDNT의 해석과 동일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ibid, 638. Thayer's Greek Lexicon을 참고하면 더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되는데, 보편적으로는 ‘갓 태어난 아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소년, 소녀를 의미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아래의 내용을 참조하라. παιδίον, παιδίου, τό (diminutive of παῖς) (from Herodotus down), the Sept. for טַף, נַעַר, בֵּן, etc.; a young child, a little boy, a little girl; plural τά παιδία, infants; children; little ones. In singular: universally, of an infant just born, John 16:21; of a (male) child recently born, Matthew 2:8, 11, 13, 14, 20; Luke 1:59, 66, 76, 80; Luke 2:17, 21 (Rec.), 21,40; Hebrews 11:23; of a more advanced child, Matthew 18:2, 4; Mark 9:36f; (Mark 10:15); Luke 9:47f; (Luke 18:17); of a mature child, Mark 9:24;)
11). TDNT에 의하면 ‘τεκνον’은 아래 각주 13)의 ‘νήπιος’ 와 유사하게 태아, 혹은 갓난아기로 설명하고 있다. op. cit, 638.
12). Strong's Concordance에 의하면 ‘βρέφος’는 영어로는 Infant로 해석하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나 ‘갓 태어난 아이’(an unborn or a newborn child)를 의미한다. Thayer's Greek Lexicon에서도 동일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를 참고하라. βρέφος, βρέφους, τό; a. an unborn child, embryo, fetus : Luke 1:41, 44; (Homer, Iliad 23, 266; Plutarch, rep. Stoic. 41 τό βρέφος ἐν τῇ γαστρί). b. a new-born child, an infant, a babe (so from Pindar down): Luke 2:12, 16; Luke 18:15; Acts 7:19; 1 Peter 2:2; ἀπό βρέφους from infancy, 2 Timothy 3:15 (so ἐκ βρέφους, Anth. Pal. 9, 567)). TDNT 역시 위의 설명과 유사한데 오히려 더 부과하여 ‘fruit of the body as embryo’라고 설명하였다. op, cit, 637
13). Strong's Concordance에 의하면 ‘νήπιος’ 역시 an infant, child로 해석하고 있으나 더 흥미로운 설명을 덧붙인다. 그것은 오래된 문서를 참고하면 ‘ne’와 ‘epos’를 설명하면서 ‘말을 아직 하지 못하는 아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를 참고하라. From an obsolete particle ne- (implying negation) and epos; not speaking, i.e. An infant (minor); figuratively, a simple-minded person, an immature Christian - babe, child (+ -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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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세례

 

1. 세례14)의 의미

칼뱅(J. Calvin)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세례의 의미를 22개의 항목으로 설명15)하는데 그 의미를 더 분명히 하고자 몇 가지로 재정리하였다. 1-6항을 정리하면서 “우리가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축복에 참여한다는 표징으로서의 세례”16)를 강조하고 있고, 10-13항을 정리하면서는 “세례식에 의해서 원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의 세례”17)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뱅이 강조하는 세례의 의미는 죄 씻음, 그리스도와의 연합, 공동체 앞에서의 믿음의 선언으로 요약할 수 있다.18)

 

2. 세례의 유익과 가치성

칼뱅이 위와 같이 주장한 세례의 의미를 성경적으로 확인해 보면 신자들이 얻게 되는 유익과 세례의 가치성을 보다 명확하게 정립19)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워진다고 하는 표징을 받은 것이다. 이 표징을 통하여서 새 언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장사되고 다시 새로운 생명에 동참20)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그의 증언을 통해 새 언약의 성도들은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그들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부활을 따라 의로 다시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처럼 함께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분명 그의 부활에도 연결될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 우리의 옛 본질(nature)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with Christ) 죽었으며, 우리는 그와 더불어 살 것(live with)을 믿는다.21) 

둘째,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연합의 표징을 제공한다. 우리의 신앙이 세례를 통해 더욱 확실하게 증거를 받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우리가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통해 교회의 왕과 머리로서 우리와 연합을 이루셨다. 바울은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 사역에 연합시켜 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주인이시며 살아계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다스림 하에 두는 것임을 강조한다.22) 이와 같은 맥락에서 칼뱅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의 세례는 성도들의 신앙에 기초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는 것이다.23) 결국 세례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셋째, 세례를 통해 신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그 자신의 신앙고백을 증거 한다. 세례는 우리가 공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표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 신자들이 하나의 띠로서 예배드리는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이다. 세례 안에서는 전통적 차이와 그밖에 인간들의 삶을 형성하는 많은 차이들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세례자들은 문화적 속함, 사회적 신분 및 성의 제약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24)

넷째, 바울의 생각을 덧붙인다면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종말론적 사건이다.25)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을 지칭할 때는 완료시제를, 그리고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지칭할 때는 미래시제를 사용한다.26)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에 참여하는 것은 현재적 일이고,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 앞에 놓여있다.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 독자들에게 종말론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세례를 사용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삶이 “아직 아님(not yet)”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세례는 한 순간적 인 의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삶의 여정의 첫 시작으로 일생동안 새로운 유산의 의미를 실현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세례는 신앙의 첫 출발일 뿐 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수행하도록 인침을 받고, 보증되고, 소유함을 받고, 청함을 받는다. 그리고 위임을 받은 사람들 중에 속하게 된다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다.27)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세례가 주는 유익과 가치성이 있음을 놓고 볼 때, “과연 세례의 은혜와 축복에서 제외되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직면하게 된다. 유아들은, 특히 현행 체제에서 놓고 볼 때 세례의 공백기에 있는 만3세 이상에서 만13세 이하의 어린이들은 놀라운 은혜의 자리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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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4). 세례에 대한 논의는 불필요하다. 우리 주님이 세우신 성례이기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 이곳에서는 세례에 대한 의미와 성도에게 주는 유익 및 가치성에 국한한다.
15).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n two volumes, chap. xv. 1303-1323
16). Ibid,. 1303-1308.
Baptism of a sign of our forgiveness, of our participation in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and also in his blessing. 이 부분에서 칼뱅은 세례의 의미가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씻긴다는 것(Baptism as Token of cleansing for the whole of life)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워진다는 것(Baptism as token of mortification and renewal in Christ), 더 나아가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Baptism as token of our union with Christ)이라고 강조하였다.
17). Ibid,. 1311-1314.
We are not by the rite of baptism set free from original sin, but by it we make confession of faith before men. 이 부분에서 칼뱅은 세례의 의미가 고백의 표로서(Baptism as token of confession) 그리고 이로 인하여 세례 받은 이들로 하여금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세례(Baptism as conforming faith)라고 설명함으로서 사람들 가운데서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증거가 된다고 강조하였다.
18).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생략한다. 본 논문의 각주1)을 참조하라.
19). 조용선, “어린이세례를 통한 기독교 교육적 가능성 모색”, 장신논단, 2011. 7, 367-391 참조.
20).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Edmund P. Clowney, The Church, (Downers Grove, IL: Inter Varsity Press, 1995), 282.를 참조하라.
21). 롬 6:5-8/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22). 롬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23). Calvin, Institute, chap. xv, ver. 6. 1307. 칼뱅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된 신자 개인들에게 주어지는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때에 그러한 신앙이 세례의 기초가 될 수는 없다고 한다. 즉 “비록 세례가 중생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된 신자들이 가시적 교회에 가입하는 신앙의 표징으로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신자들의 믿음에 기초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믿음의 고백보다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총이 중요함을 간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24). 갈3:27-28/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5). 조용선, “어린이세례를 통한 기독교 교육적 가능성 모색”, 367-391.
26). Ibid, 그 대표적인 예는 로마서 6장 5절이다. eij ga;r suvmfutoi gegovnamen tw'/ oJmoiwvmati tou 'qanavtou aujtou, ajlla; kai; th'" ajnastavsew" ejsovmeqa.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have been united/gegovnamen: givnomai의 완료 능동태 1인칭 복수)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will be united/ejsovmeqa: eijmiv의 미래 중간태 1인칭 복수)”
27). J. Westerhoff III, 기독교신앙과 자녀양육(Bringing up children in the Christian faith), 이숙종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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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유아세례

유아세례에 대해 찬반의 많은 논란이 있어왔지만 그럼에도 예장 총회를 비롯한 개혁주의 교단에서는 유아세례는 유지, 시행되어 왔다. 이제 유아세례에 대한 논의를 하되,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의28) 근간을 이루고 있는 칼뱅의 가르침을 근거로 해서 살피고자 한다.29)

1. 유아세례에 대한 제이론의 역사적 접근

신약성경 이후 세례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디다케30)로부터 나타나지만 딱히 유아세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사도전승’31) 에서는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기록하고 세례문답에 대해 관련해 거론하고 있다. 이후부터 유아세례에 관련하여 신중론자와 반대론자가 생겨나면서 열띤 논쟁이 일어나기는 했지만32) 문헌에 의하면 사도 시대에 이방인 가정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유아들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고33), 교부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초대교회에서는 이미 유아세례가 관습적으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100-165년경)의 기록에는 고령(60-70세)의 그리스도인 남녀들을 언급하는 중에 "유아 때부터 그리스도의 제자이었던" 자들이 등장하고 있으며(변호, 1. 15)34), 특히 교부들 중에서도 이레니우스(Irenaeus/130-200년경)35), 오리겐(Origen/185- 254년경)36) 등이 유아세례를 지지하며 그 시행을 권고하는 입장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교부들의 이러한 유아세례에 관한 수용입장에 대해 최초로 반대의 견해를 피력한 교부는 터툴리안(Tertullian)37)이었다. 그는 죄의 용서를 받는 세례의식은 사춘기 이전에까지는 불필요하며 타락의 가능성이 시작되는 사춘기 이후에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유아세례 연기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어거스틴(Augustine)38)은 유아들도 태어날 때부터 이미 원죄를 지니고 있기에 이 원죄의 용서와 구원을 위해 세례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어거스틴 이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모두 유아세례는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결국 418년 카르타고 회의39)에서 인준을 받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다.

16세기에 종교개혁시대에 들어오면서 유아세례는 재세례파(Anabaptist)에 의해 다시 한 번 완강한 거부에 부딪히게 된다. 그들은 막16:16,40) 마28:16,41) 롬10:1042)에 근거하여 믿기 전에 받는 세례를 일절 부정하면서 믿음과 회개를 전재하는 재세례를 요구43)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세례파의 입장에 반대하면서 루터(M. Luther)44)와 칼뱅(J. Calvin)은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지지하였는데 특히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과 언약을 통해 그 정당성이 인정되었다”45)고 하였다. 그는 구약에서의 할례가 하던 역할을 이제 유아세례가 대신 한다46)고 하면서 유아들도 세례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유아들도 이미 하나님이 언약의 일원47)이고 그리스도께서도 어린이들을 불러 축복하셨으므로 유아들을 세례의 표징과 은혜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48)는 것이다.

1943년 바르트(K. Barth)49)가 그의 “교회의 세례론”에서 반 유아세례론을 천명함으로서 이에 대한 논쟁에 또 한 번의 불이 붙게 된다. 바르트는 세례는 신앙 고백적 행위이므로 세례 받는 사람은 수동적 도구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받기를 원하는 능동적 참여자가 되어야 하며, 유아는 능동적 참여자 될 수 없음으로 유아세례는 매우 위험한 것50)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바르트의 반유아세례론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고 나선 이들은 쿨만(O. Cullman)51)과 예레미아스(J. Jeremias)였다. 예레미아스는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를 찾고자 노력하였고,52) 특히 구약과 신약에서 이끌어낸 가족공식53)의 연구를 통해 유아세례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고전1:16,54) 행16:15,55) 행18:856) 등에서 온 집(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 집에 속한 유아의 세례를 포함한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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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28).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과 다른 새로운 내용을 더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유아세례와 관련한 신앙 이해의 준거로서 핵심적인 원리들을 개혁교회가 공적으로 고백한 신앙문서들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4문답 / 문: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답: 그렇습니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여 있습니다(창17:7; 마 19:14). 아울러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죄의 용서와 믿음을 갖도록 하시는 성령님이 유아들에게도 어른들 못지않게 약속되어 있습니다(시 22:10; 사 44:1-3; 눅 1:15; 행2:38-39; 16:31). 그러므로 유아들은 언약의 표지인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이 되어야 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자녀들과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행 10:47; 고전 7:14). 구약에서는 이런 일이 할례를 받음으로 이루어졌으나(창 17:9-14), 신약에서는 할례 대신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골 2:11-13).
스위스 제 2 신앙고백서, 20장 6항 / 우리는 재침례파들을 정죄한다. 그들은 믿음의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어린 유아들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교훈에 따를 때, “하나님 나라는 그와 같은 자들의 것이며”(눅 18:16),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표지가 그들에게 주어지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친 백성이며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그들이 거룩한 세례로 성결하게 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하는 그들의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도 재침례파들을 정죄한다. 우리는 재침례파가 아니며, 또한 그들의 관점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동의를 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8장 / 실제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부모들 중에 둘 다 또는 어느 한 편이 믿는 신자의 경우, 그들의 자녀들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4항). 세례의 효력은 세례가 시행이 된 그 시각에만 나타나도록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규칙에 따라서 올바르게 시행을 하면 약속된 은혜가 주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자신의 뜻의 경륜에 따라 은혜가 주어지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늙은 사람이든지 유아이든지) 성령에 의하여 제시되고 수여가 된다(6항).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66문답 / 문: 세례는 어떤 이에게 시행이 되어야 합니까? 답: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에게 대한 순종을 고백하기까지는, 유형적 교회 밖에 있어 약속의 언약의 외인인 자들에게는 세례를 베풀 수 없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그를 향한 순종을 고백하는 양친 또는 그중 한 사람만 믿는 부모에게서 난 어린 아기들은 그 점에서 언약 안에 있으므로 세례를 베풀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95문답 / 문: 세례는 어떠한 사람에게 베푸는가? 답: 세례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며 그에게 복종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베풀 것이요, 또 입교한 자의 자녀에게 베푸는 것이다.
29). Lyle D. Bierma, "Infant Baptism in the Reformed Confessions," 231-35.에 유아세례에 관한 주요 신앙문서들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Joel R. Beeke and Sinclair B. Ferguson, eds., Reformed Confessions Harmonized (Grand Rapids, MI: Baker, 1999, 4th printing 2002)는 개혁주의 신앙고백들을 항목별로 비교하여 살피기를 원할 경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30). 정양모, 디다케 : 12 사도들의 가르침, (왜관: 분도출판사, 1993.) 3-10. ‘디다케’의 원래 제목은 ‘12제자를 통한 주님의 열방에 대한 가르침’이며 줄여서 ‘12제자의 가르침’이다.
31). Hippolytus, 사도전승 (Traditio Apostolica), 이형우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98.)
32). 노학용, 김상구, “예배 문헌에 나타난 유아세례 이해와 활성화 방안”, 복음과 실천신학. 제 25권 2012 봄호, 96.
33). Joachim Jeremias, Infant Baptism in the First Four Centuries, trans. David Cairn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23.
34). 김효성, “교회론”, 조직신학, 서울: 옛신앙출판사, 2016.
35). Ibid., 이레니우스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통해 중생하는 모든 연령의 사람, 즉 영아들과 유아들과 소년들과 청년들과 노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다"고 하였다(이단 반박, 2. 39)을 재인용.
36). H. Orton Wiley, "The Church: Its Worship and Sacraments", Christian Theology 3 Vols. (Beacon Hill Press of Cansas City, 1943), Vol Ⅲ, Part Ⅳ, 32, 184. 오리겐은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37). Tertullian, De Baptismo, XVIII. Alexander Roberts, The Ante-Nicene Fathers, Vol. III. (Grand Rapids,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51), 677-78.를 조기연, “유아세례와 성결교회”, 성결교회와 신학 창간호, 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역사연구소, 1997. 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 3세기는 유아세례에 관한 비교적 많은 자료를 남기고 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은 카르타고의 터툴리안(Tertullian)과 히폴리투스(Hippolytus)가 남긴 작품들이다. 터툴리안은 유아세례를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물론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당신께 나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가르쳐질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적어도 학생신분으로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청년시기에 주님께로 나와야한다고 하였다. “왜 순진무구한 나이에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가?” 하고 질문 하면서 세례를 늦추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였다. 미루어보건대 터툴리안은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아는 아직 용서받을 만한 죄가 없으므로 세례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터툴리안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오염이나 감염에 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세례와 관련하여 원죄의 교리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Robert M. Grant가 그의 책 Development of the Catechumenate in The Murphy Center for Liturgical Research, Made, Not Born, (Notre Dame and Londo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76.) 35. 에서 설명했다고 조기연은 부연한다.
38). Sinclair B. Ferguson, David F. Wright, (ed.), New Dictionary of Theology, (IVP, 1988.) 71. 어거스틴(Augustin)은 세례가 구원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확신했다. 펠라기우스(Pelagius)와의 논쟁에서 그는 원죄와 세례사이의 연결점을 발전시키면서 유아세례를 정당화시켰다. 그는 유아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믿음은 그들에게 효과가 있고 이것은 유아세례를 정당화하는 고전적인 입장이 되었다.
39). 원죄의 교리를 부정하는 펠라기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어거스틴의 원죄교리가 인정받은 종교회의이다. 그런데 역사학자인 F. F Bruce의 연구에는 아주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세례는 죄의 씻음으로 의미화 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원죄의 교리를 주장하는 어거스틴의 유아세례의 주장은 일관성이 있다. 그런데 원죄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펠라기우스 역시 유아세례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Bruce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과는 달리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원래의 죄를 정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보다 고상한 성화(higher sanctification)를 부여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만약 펠라기우스에 대한 Bruce의 연구가 옳다면 세례를 단순히 죄의 씻음을 넘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를 강조하는 세례에 대한 성경적 해석은 근자에 들어와서 강조된 것이 아닌 이미 교부시대 때에 연구되었던, 그것도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던 이에 의해서 더 분명하게 정리된 신학적 아이러니가 아니라 할 수 없겠다. 이 부분에 대해서 F. F Bruce, 복음은 불꽃같이: 초대교회 역사(The Spreading Flame), 서영일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427.를 참조하라.
40).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4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42).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43). 박건택 편역, “니고데파, 재세례파, 자유파 논박”, 칼빈작품선집Ⅴ (서울:총신대학교 출판부, 1998), 105-106
44). 권호덕, 개혁주의 교회론 (서울: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의안, 2010), 166. 루터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유아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의 도움을 받는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아이들 안에서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신앙을 일으킨다.”
45). Calvin, Institute, chap. ⅩⅥ. 1324.
46). Ibid., 1325.
47). Ibid., ver 5. “Infants are participants in the covenant”
48). 유아세례를 언약의 관점에서 해석한 이는 칼뱅 외에도 츠빙글리가 있다. 그는 “유아들은 언약의 상속자요 후손들이기 때문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세례는 할례보다 더 부드러우며 고통도 피 흘림도 없으며 남아와 여아를 모두 품는 것”이라고 하였다. Alister McGrath, 종교개혁사상(Reformation Thought: An Introduction), 최재건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2006), 290.
 Ibid., ver 7-9. “Christ invited and blessed little: we should not exclude them from the sign, and the benefit, of baptism”
49). Karl Barth, The Teaching of the Church Regarding Baptism, trans. Ernest A. Payne (London: SCM Press, 1954). 참조.
50). 진성용, 세례론: 칼 바르트의 성령론적 세례론, (서울: 한들출판사, 1999), 257.
51). Oscar Cullman, Baptism in the New Testament, trans. J.K.S. Reid(Chicago: Henry Regnery Co., 1950). 참조.
52). Joachim Jeremias, Infant Baptism in the First Four Centuries, trans. David Cairn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15-16. 참조.
53). 예레미아스의 가족공식이라는 것은 가족의 결속과 연대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구약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보았는데, 가족을 대표하는 아버지의 회심은 바로 온 가족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며, 가족의 세례에는 분명이 유아도 포함된다고 본 것이다.
54).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5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56).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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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아세례에 대한 개혁주의의 관점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유아세례를 논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칼뱅에 집중57)하지 않을 수 없다. 칼뱅의 유아세례는 재세례파와의 논쟁을 통해 더욱 견고하게 발전 했는데, 그는 유아세례가 할례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58) 있으며 ‘언약 약속의 표지’59)로 보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60)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특히 기독교강요에 유아세례를 구약의 할례와 연결61)시키면서 “유아들도 언약에 참여한다.”는 주제 하에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강하게 주장 한다.

처음에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할례를 시행하라 하셨을 때에는 반드시 할례가 의미하는 모든 것에 그의 백성들로 참여하게 하셨다. 그렇지 않고 그들에게 무의미한 상징을 시행하라 하셨다면 그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우롱이었을 것이며 이것은 듣기만 해도 무서운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자그마한 유아들에게 행하는 할례가 언약을 확인하는 인을 대신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이 언약이 지금도 확고부동하게 유효하다면 구약시대 유대인의 유아들 못지않게 현대 그리스도인 자녀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표징이 의미하는 일에 그들이 참가한다면 표징을 그들에게 거부할 이유는 무엇인가? 62)

이어 칼뱅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63)을 구체적으로 들면서 비록 복음서의 기자들이 유아세례에 대해서 ‘하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한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에는 유아들은 빼놓은 것이 아니므로 바른 정신이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유아세례를 베풀라.”는 기사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유아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겠는가?64)라는 질문으로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제기한다. 또한 “유아들은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65) “유아들은 회개하거나 믿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역시 세례를 베풀 수 없다”66)는 등의 여러 도전에 대해서 그는 단호하게 “어린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67)고 항변하면서 “세례를 받은 어린이들 안에서 성령께서는 역사하신다.”68)라고 쐐기를 받는 듯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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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57). 유아세례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해 주는 자료로서 칼뱅의 ‘기독교강요’보다 더 잘 설명된 곳은 없을 것이다(참조, Calvin, Institute, chap. ⅩVI. 1324-11359). 특히 칼뱅은 언약적 관점에서 이 주제를 다룬다. 본 논고에서는 칼뱅의 설명을 중심으로 유아세례와 언약의 관계를 살펴본다.
58). Calvin, Institute, 1325-1326.
59). Louis Berkhof, The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Grand Rapids: Baker House, 2001), 292.
60). “Infant baptism best accords with Christ’s Institution and the Nature of the Sign”
61). 할례에 대한 성경의 교훈이 어떻게 세례의 이해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에 대한 논의는 이곳 각주에서 참고로 설명하는 것으로 대체하고 본문에서는 생략하겠다. 세례의 의미와 적용은 구약에서의 할례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즉 세례가 할례를 대체하고 있다는 주장의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골 2:11-12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들어오기 위하여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을 향하여 바울은 골2:11-12에 근거하여 할례는 이미 세례로 대체가 된 것이라는 신학적 변증을 함으로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적 할례를 이미 받은 자들인데, 그 까닭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그리스도의 할례에 참여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뜻한다. 구약의 할례는 몸의 작은 일부를 찢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할례는 육적 몸을 벗는, 즉 온 몸을 찢는 죽음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었으며 구약의 할례의 성례전적 의의를 이루는 할례의 성취였다.(참고. G. R. Beasley-Murray, Baptism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62, reprinted 1990), 152-53.)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할례가 상징하던 것, 곧 죄인을 끊어내는 죽음으로 정죄의 심판을 청산하는 일을 감당하신 것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참고. Edmund P. Clowney, The Church, (Downers Grove, IL: Inter Varsity Press, 1995), 28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할례를 이미 받은 자들이며, 이것은 또한 세례를 통해 그들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행하는 할례를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할례는 세례로 대체되었음을 뜻한다.(참고. G. R. Beasley- Murray, Baptism in the New Testament, 158-59.)
62). Calvin, Institute, 1328.
63). 마19:13-15 참조.
64). Calvin, Institute, 1331. 칼뱅은 이 부분을 다룰 때 놀랍게도 믿음의 법칙이라는 용어로 독자들을 설득한다. 만약에 유아세례에 대해 행하라는 기사가 없기에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옳다면, 사도시대에 여자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했다는 기사가 없으므로 주의 성찬에서 여자들은 제외해야 할 것이라고 강변한다. 칼뱅은 여기서 믿음의 법칙을 제시한다. “but here we are content with the rule of faith(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법칙으로 만족한다.)” 성찬에 여성이 참여했다는 기사가 없음에도 믿음의 차원에서 보면 여성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을 가리켜 믿음의 법칙이라고 한 것이다. 칼뱅은 바로 이 믿음의 원칙을 소개하면서 성찬에서 그랬다면 세례에서도 이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는 재차 강조한다. “세례는 큰 사람들과 똑같이 유아들에게도 합당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65). Ibid., 1341.
66). Ibid., 1342.
67). Ibid., 1339. “Children should also have life in Christ.” 여기서 이 논문이 다루고자 하는 이슈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한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Children’이다. 유아세례를 다룸에 있어 칼뱅 역시 ‘Infant’를 사용하다가 이 부분에 와서는 ‘Children’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슈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논하겠지만, 사실 유아세례는 이미 살펴본 대로 이슈가 될 정도의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유는 유아세례가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소위 믿음의 법칙 등을 고려해 볼 때 유아세례는 성경적이라는 것이 본 논의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이슈가 더 등장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아세례의 적령기를 ‘만2세’로 규명한 것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제기되는 이슈는 “누가, 왜 ‘만2세’로 정하였는가?”, “그 ‘만2세’는 정당한 것인가?”, “오히려 세례의 공백기라고 할 수 있는 만3세에서 만13세까지를 포함하는 ‘Infant’가 믿음의 법칙에서 더 정당한 것이 아니겠는가?”이다. 칼뱅이 의도적으로 선언하였든, 의미 없이(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던진 것이든, ‘Infant’가 ‘Children’으로 바뀐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Infant’가 주는 오해(사실 ‘Infant’를 냉정하게 분석하면 오해의 소지가 없다. ‘Infant’가 꼭 유아만을 위미하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의 Ⅰ들어가며 3.연구 방법 및 절차를 참고하라. 본 논문 3.)를 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68). Ibid., 1344. “Operation of the Spirit in baptized child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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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아세례에 대한 반대 주장의 오류와 유아세례의 당위성

유아세례의 당위성을 논함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는 재세례파의 도전과 같은 방식으로서의 방법이다.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개혁주의에서는 “성경에 유아세례가 나타나지 않는데 왜 유아세례를 고집하느냐?”는 재세례파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개혁주의에서는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재세례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성경에 유아세례를 베풀지 말라는 명령이나 권고가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69) 신약성경에 유아세례를 금하는 명령이 없다는 것은 유아에게 할례를 행하여 온 것과 같이 할례와 동일한 성례전적 표지이며 인침인 세례를 유아에게 행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마땅하다70)는 사실을 암시하여 주는 것이 된다.71)

머레이(John Murray)는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일곱 가지 이유72)들을 나열하며 그것들의 오류를 밝히고 있다. 본 논의에서는 이를 근거로 유아세례에 대한 반대 주장들의 오류를 정리하고자한다.

첫째,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는 가장 큰 근거는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라”는 구체적인 명령과 유아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명백한 성경적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설명을 한 바와 같이, 유아에게 세례를 금하는 명령이 성경에 분명하게 없는 한, 그러한 관찰들은 성경이 결코 유아에게 세례를 주지 않도록 금하고 있다거나 실제로 세례를 준 사례가 없다는 증거가 결코 되지 못한다.74)

둘째, 유아세례 반대론자들은 세례는 신뢰할 수 있으며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신앙이 고백된 후에야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 한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고백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는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75)고 말한다. 하지만 오직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한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다는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76) 예를 들어, 가장이 세례를 받음으로 인하여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을 경우 각각 다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인의 경우에는 세례를 받기 이전에 신앙을 고백하여야 했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도 신앙의 고백이 요구되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77)

셋째, 유아들이 과연 중생을 하였는지, 또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지를 알 길이 없다는 이유로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타당성이 결여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세례는 세례를 받는 이가 중생한 자라는 지식에 기초하여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들의 경우에도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그들이 중생한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으며 신뢰할 만한 신앙고백을 하였기 때문이다.78) 따라서 세례를 중생한 자임이 확인된 자에게 베푸는 것이기 때문에 유아에게 세례를 줄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79)

넷째, 유아들은 세례를 받아도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을 누리지 못하며, 따라서 유아들에게는 세례를 준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라면 할례도 유아들에게 베풀어야 할 이유가 없게 된다. 할례나 세례는 모두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례이며 은혜의 수단이다. 유아에게 할례를 주도록 한 하나님의 뜻이 헛되지 않다면 세례를 유아에게 주는 것 또한 헛될 이유가 없다.80)

다섯째, 유아세례를 받았으나 성장하면서 신앙의 길에서 떠나 불경건의 죄에 빠져 버린 비극적인 사례들을 들면서 유아세례에 대하여 반대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동의가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들은 성인세례를 받은 자들 가운데서도 발견이 되는 일이다.81) 따라서 이 부분에서 다뤄야 할 부분은 유아세례의 불필요성이 아니라 유아세례 이후에 은혜의 수단들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해서 양육자와 성장하고 있는 본인이 경건의 책임과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함을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82)

여섯째, 할례와 세례는 그 차이가 너무나도 다른 것이기 때문에 할례에서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할례와 세례는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니다. 할례와 세례는 그것들의 의미에 있어서 은혜언약의 표지이며 인침이라는 본질적인 동일성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이 점은 성경 자체가 증언하고 있다.83) 본고는 이미 이 점에 대해서 다룬 바가 있다.84)

일곱째,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주장에서는 유아세례 찬성론자들이 할례에 빗대어 유아세례를 정당화 하면서도, 유월절에 온 가족이 참여하였던 것과는 달리 세례를 받은 유아들에게 성찬의 참여를 허용하지 않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비판을 한다. 하지만 유월절에 유아들에게도 유월절 음식을 먹도록 하였다는 것은 역시 조심스러운 적용이다.85)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유월절 음식이 어린이들에게는 몰라도 유아들에게는 결코 적절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86)

이상의 논술을 통해서 볼 때 유아세례는 그 당위성을 얻게 된다. 칼뱅이 주장한 바와 같이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하며,87) 그 어린아이도 응답할 수 있는 인격체88)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세례는 새로운 삶에로의 여정임을 이해해야 한다. 세례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이다. 성인에게 있어서도 세례는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선물이다.89) 그것은 믿음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훈련을 시작하는 시점이다. 성인인 그리스도인은 과거의 삶으로부터 돌이켜 회개하고 새로운 믿음의 삶을 살 것을 요청받는다.90) 이것은 유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져야 한다. 유아들(칼뱅에 의하면 어린이91))도 자라나면서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결국에 세례 받은 뜻을 깨닫게 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9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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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69). Bryan Chapell, "Pastoral Overview of Infant Baptism" in The Case for Covenantal Infant Baptism, 18.
70).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유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례가 성경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사실이 유아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음을 말하여 주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2천년 동안 이어져 왔던 관행, 즉 유아에게도 할례를 베풀었다는 상황을 고려할 때, 유아세례를 금하는 명령이 없다는 것은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미 칼뱅이 주장한 믿음의 법칙이라는 차원으로 놓고 볼 때(각주 64 참조) 유아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구체적인 사례가 없다고 하더라도, 온 가족이 다 할례를 받았다는 정황은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방증하여 주는 것이다. 브라이언 채플 은 이에 대하여 “신약에 있는 세례의 기록을 읽을 때, 어떤 이가 회심을 할 경우 가족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된 사람은 그 가족들 모두가 또한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고 하면서, 성경의 고넬료(행10:38), 루디아(행16:15), 스데바나(고전1:16), 그리스보(행18:8)등을 예로 들었다. 실로,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또한 신약성경이 개인에게 세례를 준 일을 세세히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세례 받는 이와 함께 하고 있는 가족들도 또한 세례라는 언약적 표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증들은 분명 유아세례가 성경적이며, 유아세례를 가리켜 성경의 교훈에 어긋난다는 주장은 성립이 되지 않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Ibid., 19, 21.
71). 김병훈, “유아세례의 신학적 의미와 설교”, 헤르메니아 통권 48(2009 가을), 15-44. 참조.
유아들이 언약에 포함이 되고 그들이 또한 언약의 표지와 인장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명백한 권위로 정해진 원리를 신약이 취소한다거나 최소한 최소화하는 암시라도 주고 있는가? 이러한 관행은 거의 2천년 동안 은혜언약의 실행 과정에서 하나님의 권위로 이어져 왔다. 그것이 이제는 그쳐진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취소되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새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의 개진이라는 점에서 볼 때, 할례와 세례에 덧붙여진 의미가 기본적으로 서로 동일하다는 점에서 볼 때, 신약과 구약의 세대에서 시행이 되는 은혜언약이 동일하며 연속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만일 관행이나 원리가 신약에서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취소되거나 폐지되었다는 증거가 반드시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확신 있게 강조할 수 있다.
72). John Murray, Christian Baptism, (Philadelphia, PA: The Committee on Christian Education,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1952), 72-73.
73). Calvin, Institute, 1331. 각주64 참조.
74). John Murray, Christian Baptism, 72-73.
75). Calvin, Institute, 1342. 칼뱅 때에도 이 문제는 이슈였다. 칼뱅은 이 사안에 대해서 Objection: infant are capable neither of repentance nor of faith 부분에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그는 이런 도전을 창에 비유하여 말하기를 “이런 창은 우리를 향한다기보다 하나님을 향해 던지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할례 또한 회개의 표라는 것과, 바울역시 할례를 믿음으로 인한 의의 인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들어 왜 하나님께서 유아들의 몸에 할례의 인을 치셨는지는 하나님께 물어야 할 것이라고 도전한다. 세례와 할례는 같은 경우이기 때문에.
76). Joachim Jeremias, Infant Baptism in the First Four Centuries, 참조. 예레미야스는 여러 가지 유아세례의 근거 가운데 특히 가족세례의 예를 구약과의 관련성 속에서 주장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증거를 제시했다고 평가하였다. 사도들이 보고하는 초대교회의 모습 가운데 행10:44-45, 16:15, 33-34, 고전 1;16 등에서 가족세례의 예들이 언급되고 있다. 이 구절들에서 사용된 집(oi\ko")이라는 의미는 집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 즉 그 가족과 고용된 종들과 심지어는 짐승들까지도 포함하는 용어라고 예레미야스는 지적한다. 그는 신구약 성경 모두에서 지칭 되는 집(oi\ko")과 관련된 문구는 가족공동체라는 집단적 개념으로 파악해야한다고 보았다. 이 예레미야스의 주장처럼, 그 어느 민족보다도 더 강한 가족공동체의 결속력을 소중히 여기는 유대인들의 가족세례는 그들의 할례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온 가족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융합시키는 일에 그들의 귀중한 믿음의 기업을 이어받을 유아들을 제외시키지 않았으리라는 확신은 어렵지 않다. 구약에서 나타나는 세례의 예표들도 온 가족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노아는 그의 온가족과 함께 홍수에서부터 구원을 받았고(벧전3:20, 2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을 때 가족에 속한 모든 남자들에게 시행되었으며(골 2:11, 12), 온 이스라엘이 함께 홍해를 통과하였음도(고전10:1, 2) 가족세례의 좋은 예표가 되고 있다.
77). John Murray, Christian Baptism, 73-74.
78). Calvin, Institute, 1348. Reborn “of water and the Spirit”을 참조하라.
79). John Murray, Christian Baptism, 74.
80). Calvin, Institute, 1341-1342.를 참조할 수 있으며, 이미 본 논의에서도 다루었다. “유아세례에 대한 개혁주의의 관점” 10-11.를 참조하라.
81). Ibid., 이 부분에 대해서 일정부분 동의는 되지만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명분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 부분을 염려하던 칼뱅은 어른들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그 동일한 역사가 아이들 안에서도 역사하신다고 강변한다.
82). John Murray, Christian Baptism, 75.
83). 골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84). 본 논문 각주 58)와 59)을 참조하라.
85). Calvin, Institute, 1346. 칼뱅의 시대에도 이 부분에 대한 도전이 있었다. 칼뱅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른들에게 관한 성경의 말씀은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지 말라(Scriptural statements which refer to adult should not without further evidence be applied to children)고 매우 강한 어조로 논박한다.
86). John Murray, Christian Baptism, 77-79.
87). Calvin, Institute, 1339.
88). 재세례파나 바르트의 경우처럼 유아가 신앙고백을 할 수 없다하여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러한 태도는 유아의 특성과 유아에게 향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류라고 본다. 성경은 심지어 태아도 하나님께 인격적인 반응을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눅1:41은 엘리사벳의 태중 아이가 주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옴을 알고 기뻐 뛰놀았다고 보고한다. 이는 태중아이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고, 응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마21:16과 시8:2에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신다고 한 것은 유아도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음을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89). 본 논문 각주23) 참조.
90). Calvin, Institute, 1311.
칼뱅은 세례이후에 성도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죄를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We must strive to overcome persistent sin). 그렇다. 믿음은 일순간의 고백이 아니라 일생동안 자라가는 과정적 현상이다. 믿음에 있어서는 세례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신앙고백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세례 후 그의 일생동안의 신앙적 삶의 여정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지속적이고 발전적으로 유지해 가는 문제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91). 본 논문 각주 67) 참조.
92). Calvin, Institute, 1344. “The child grows into an understanding of his baptism” 어린아이들도 세례를 받을 때 믿음의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데, 미리 그렇게 된 다음에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면서 새로운 삶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부모가 그들의 자녀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가족에로 접속시키는 표인 유아세례는 앞으로의 신앙성장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104회기 총회 임원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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