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준 목사는 누구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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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준 목사는 누구인가?(2)
  • 개혁타임즈(Reformed Times)
  • 승인 2019.09.2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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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성결교회에서 열린 교사 강습회를 계기로
서울 신당동에 꽃동산교회를 개척
허허벌판에 콘테이너로 꽃동산교회 이전
개척 6개월 만에 장년 500여명, 어린이 1000여명이 모이다.

총회장 추대후 기뻐하는 김종준 목사 모습
총회장 추대후 기뻐하는 김종준 목사 모습
총회장 추대후 기뻐하는 김종준 목사 모습
총회장 추대후 기뻐하는 김종준 목사 모습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삶의 현장으로 복귀했다. 총신대 3학년 2학기. 나는 서울 면목동 한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부임했다. 교회학교 학생은 약 60여명. 성에 차지 않는 숫자다. 교회학교 부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놀랍게도 교회학교 교사들이었다.

교사들은 대부분 교회생활 10년 이상 된 고참 집사들이었다. 그들은 변화를 원치 않았다. 그들에겐 뜨거운 열정이 없었다. 수십 년 동안 동일한 방법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뿐이었다. 젊은 전도사로서는 그들을 지도하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 교회학교 교사를 해야 합니다. 이제 원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모두 바꿉시다.”

나는 개혁을 선포했다. 그리고 교사들을 모두 바꾸어버렸다. 사람들과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이고 싶진 않았다. 교역자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여름성경학교를 앞두고 모두의 지혜를 모았다. 교사들은 호돌이나 토순이 인형을 쓰고 다니며 어린이들을 교회로 불러 모았다. 교사와 어린이들이 교회 주변을 행진하며 전도활동을 벌였다. 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했다. 교회학교를 맡은 지 1년여 만에 어린이 신자가 700여명으로 불러났다. 군인교회의 기적이 이곳에서도 재현된 것이다. 나에겐 ‘어린이 전도왕’이란 영광스런 별명이 붙여졌다.

총회장 추대 직후 총회장 김종준 목사와 서인숙 사모 모습
총회장 추대 직후 총회장 김종준 목사와 서인숙 사모 모습

교회부흥은 열정과 기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야 가능한 일이다.

“교회학교 성장비결을 좀 공개해주세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런 부탁을 받았다. 나 역시 교사훈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국교회에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인근 교회 교육부장과 전도사들에게 공문을 보냈다. 교회학교연합회를 만들어 정기적인 교사강습회를 갖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모두 대찬성이었다. 우리는 강습회를 열어 찬양 율동 인형극 시청각교육 등을 가르쳤다. 이것이 훗날 한국어린이교육선교회의 모태가 됐다.

제104회 총회 신임원들과 함께한 모습
제104회 총회 신임원들과 함께한 모습

 

서울 중앙성결교회에서 교사 강습회가 열렸는데, 무려 1500여명의 교사들이 참석했다. 이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아직도 사명감을 가진 교회학교 교사들이 많다는 증거였다. 교사들을 위해 ‘단비’라는 교육용 책자도 만들었다. 책을 찾아올 돈이 없어서 매혈을 한 적도 있었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준비해둔 돈으로는 ‘꽃동산 주보’를 개발했다. 이 주보는 한국교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기존의 주보와는 차원이 달랐다. 주보에 만화 성경퀴즈 동화 등을 그려 넣었다. 한때 60만 명의 어린이들이 이 주보를 받아볼 정도였다.

분주한 나날이 이어졌다. 신대원에 다니랴, 강습회 인도하랴, 교회학교 운영하랴, 정말 정신이 없었다. 한국교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며 나름대로 큰 보람도 느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항상 허전했다. 그것은 목회에 대한 갈증이었다. 너무 분주한 삶을 살다보니 내 자신의 영성이 많이 황폐해져 있었다.

“목회를 시작하자. 내 스스로의 영성을 위해서라도 목회를 해야 한다. 어린이교회의 한 모델을 만들어보자.”

꽃동산교회에서
꽃동산교회에서

1986년 6월 15일, 서울 신당동에 건물을 빌려 꽃동산교회를 개척했는데, 교회를 개척한 지 6개월 만에 30평 예배당이 어린이들로 차고 넘쳤다. 믿기지 않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새로운 목회지를 찾아보자. 하나님이 예비해놓은 땅이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서울 곳곳을 다니며 새로운 목회지를 물색했다.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상계동. 그곳엔 한창 아파트가 건축되고 있었다. 초등학교는 아이들을 한꺼번에 수용하지 못해 2부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어린이가 가장 많은 동네였다. 내가 가진 돈은 고작 2000만원. 건물 지하를 얻기도 부족한 액수였지만, 부동산을 운영하던 장로님이 엉뚱한 제의 340평의 밭을 덜컥 계약해버렸다.

그 결과 1988년 4월30일. 상계동 꽃동산교회가 탄생했지만, 허허벌판에 닥지닥지 들어선 컨테이너 몇 개. 그것이 우리 교회였다. 은행 융자는 처음부터 아예 불가능했다. 결국 사채를 빌려 중도금을 해결해나갔다. 월 3부가 넘는 이자를 감당하느라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매입한 땅이 경매에 들어가기 직전 겨우겨우 사태를 해결하곤 했다.

제104회 총회 회의장에서 총대들에 인사하는 꽃동산교회 교인들 모습
제104회 총회 회의장에서 총대들에 인사하는 꽃동산교회 교인들 모습

결국 나는 상계동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하나님, 저에게는 어린이 전도의 달란트가 있어요. 이제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멋진 잔치를 열어주고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라고 기도했다. 당시 장년 신자는 고작 10여명. 교인들과 힘을 모아 여름성경학교를 열었다. 대한수송협회 버스 5대를 빌렸다. 자동차에 ‘어린이들이여 꽃동산교회로 오세요. 주님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라는 글이 적힌 현수막을 달았다. 자동차는 주일마다 노원구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 덕분에 1000여명의 어린이가 교회에 모였다. 물론 여러 가지 악소문도 돌았다.

그럼에도 성경학교 마지막 날에는 학부모들을 초청해 찬양·율동·동화구연대회를 열었다. 그날 자녀들의 발표회를 구경하기 위해 1500여명의 부모가 교회를 찾았다. 허허벌판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 중 136명이 다음 주일에 새신자로 등록했다. 그리고 1988년 10월 30일. 이 날을 총동원 전도주일로 선포했는데, 새벽부터 3000여명의 주민들이 몰려 들었다.

교회의 열악한 환경은 여전했으나, 계속 성장해 교회 개척 6개월 만에 장년 500여명, 어린이 1000여명이 모이는 중형 교회로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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